'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말이 되는' 이유
토요 시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서양 속담이 있다. 어떤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가 세부사항 속에 숨어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원래 이 속담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는 표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떤 것이 대충 보면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속담이어서 오랫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할 때는 철저하게 해야 하며, 특히 세부사항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전대미문의 내란과 탄핵 정국 속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불안정과 대혼돈에 갇혀 운명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학계와 경제계에서 던지는 조언 중 곧잘 등장하는 속담이기도 하다. 필수적으로 수반돼야 할 절차, 특히 민주적 정당성이 전제돼야 할 절차가 깡그리 무시됨으로써 초래된 무지막지한 혼란과 갈등, 반목과 좌절, 폭력과 폭동이 이어지면서 하루 아침에 신용과 정체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주목한 이들은 하나 같이 '디테일의 부족'을 강조한다.
민주적 정당성 전제돼야 할 절차 깡그리 무시,
무지막지한 혼란·좌절·폭력 초래…
”디테일 부족”
볼트와 너트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는 설계로 유명했던, 그래서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처음 사용한 독일의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도 아마 우리의 현 상황을 바라본다면 사소한 디테일 부족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지 않느냐고 경고하고도 남을 법하다.
국민 다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의해 파면되기까지의 과정과 내란을 동조했던 세력들이 다시 정권을 부여잡기 위해 조기 대선을 앞두고 활개치는 모습, 대통령 권한대행들마다 볼트와 너트가 빠져 보인 듯한 오락가락한 행보를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더구나 계속 진행 중인 불안한 내란 국면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이토록 혼란하고 어지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안일한 행정과 지방의회의 비위·일탈이 끊이지 않아 지역사회를 더욱 무겁고 힘들게 짓누르는 곳이 늘어만 가고 있다. 최근 전북에서 이러한 사례가 잦은 가운데 한 군지역에서는 시민단체와 지역 정치권이 나서서 군수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이어 재무제표를 허위로 기재한 뒤 군 공모사업에 민간업체가 참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두 차례 연거푸 고발하는 사례가 이어져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해당 군과 군수는 따가운 세간의 시선을 받고 있음에도 사법당국은 꿈쩍하지 않고 있고, 군수와 민간업체 대표는 오히려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거나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코웃음으로 일관하고 있어 원성이 높다. 더욱이 이 같은 내용을 주류 언론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풀뿌리 지역 언론들에 의해 그나마 자세히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부안군·㈜자광홀딩스,
'특혜 의혹' 이어 '허위 서류 제출 의혹' 추가 고발…
느슨한 사법당국, 눈감은 언론들
진보당 김제부안지역위원회와 전주시민회가 지난달 13일과 이달 17일 전주지검 앞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고 부안군수와 (주)자광홀딩스 대표 등을 고발한 것은 우리사회에 총체적으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단적인 사례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안일한 행정과 이를 감시·견제해야 할 지방의회의 무기력, 사법당국의 느슨함, 언론의 침묵 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어서 짚지 않을 수 없다.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가 합세해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이슈는 (주)자광홀딩스가 부안군 체비지를 2022년 12월 265억원에 매입하기로 했음에도 중도금과 잔금 240억원을 납부 기한이 2년여가 지난 최근까지 내지 않자 '특혜를 주고 받았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 내용이다. (주)자광홀딩스는 2022년 12월 계약금 26억원만 납부하고 2023년 3월 20일까지 납부해야 할 중도금 106억원과 그해 6월 20일까지 납부해야 할 잔금 132억원을 올 3월 현재까지 납부하지 않았음에도 부안군은 또 다시 기한을 올 10월까지 추가 연장해 주어 특혜란 주장이 제기됐다.
여기에 ㈜자광홀딩스 대표는 부안군과의 사업 진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부안군수의 아들을 관계사인 ㈜자광에 취입시키고 급여를 지급한 만큼 이는 명백한 뇌물 제공 및 대가성 금품 수수에 해당한다는 의혹까지 더해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지만 이에 대한 부안군수와 업체 대표, 검찰 반응은 전혀 대조적이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특혜 의혹 당사자인 권익현 부안군수는 고발당한지 6일 만인 지난달 19일 부안군청이 아닌 전북특별자치도의회에서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고 “변산해수욕장 관광휴양콘도 특혜는 없었다”며 “제 아들이 ㈜자광에 특혜 채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이날 권 군수는 “특혜 채용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근거 없는 말로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범죄행위”라며 “법적 대응으로 맞서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법적 조치”
대응 논리·방법 '흡사'
하지만 군정 조정위원회를 거쳐 체비지 매매대금 등을 연기해 준 것은 명백한 특혜란 주장과 함께 당시 군정 조정위위원회 정원이 23명인데 10명만 참석함으로써 조례 제4조(회의) 5항의 ’과반수 참석, 과반수 찬성‘을 위반한 점, 아들의 관계사 취업의 대가성 또는 이해충돌 가능성 등에 대한 해명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 후 부안군에서는 이렇다 할 후속 방안 마련이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주지검은 이러한 내용의 고발장을 접수 받고 즉각 담당 사건의 검사실을 배당했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수사 진행 상황이나 결과 발표가 없다.
그러자 진보당 김제부안지역위원회와 전주시민회는 17일 전주지검 앞에 다시 모여 "검찰은 전은수 자광홀딩스 대표의 허위 재무상태표 제출 의혹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자광홀딩스 사문서(재무상태표) 위조 부안군 제출 의혹 추가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철저한 수사 촉구와 함께 추가 고발장을 접수했다.
부안군 변산해수욕장 관광지 관광휴양콘도 민간투자유치사업의 2019년 공모 당시 민간사업자 신청 요건은 ‘자산규모 100억원 이상, 자기자본 50억원 이상’이었으나 2021년에는 자산규모가 1,000억원 이상으로 상향되고, 자기자본은 10억원으로 하향 변경돼 당시 사업자로 선정된 ㈜자광홀딩스에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게 고발장의 주된 요지다.
그러자 이에 대해 (주)자광홀딩스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반박했다는 언론 보도가 즉각 나왔다. 그러면서 “추후 진행되는 상황을 살펴본 뒤 그에 맞는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앞서 부안군수의 해명 논리와 법적 대응할 것이란 방법과 흡사하다.
악마는 '디테일' 아닌 '말' 속에?
해당 민간업체는 전주시의 대단위 도심 개발사업지구인 옛 대한방직 전주공장 부지에 3,000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를 비롯한 타워, 호텔, 상업시설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초기부터 많은 특혜 의혹과 편법 논란을 일으킨 (주)자광과 대표가 같은 특수관계사란 점에서 더욱 오해와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지만 행정과 사법당국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더욱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다.
해당 군수와 민간업체 대표는 “혹세무민 말라”거나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하며 의혹의 중심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지만 시민사회단체와 지역 정치권의 고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말이 안 되는 건 오히려 그들의 해명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게 아니라 '악마는 말' 속에 숨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케 한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