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 학파의 '전주 3재'와 노사 학파의 '고창 3재'...'지행합일' 실천해 온 선비들 정신 다시금 그리운 '시국'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78)
요즈음 도민들 들뜨게 하는 뉴스 하나가 올림픽 유치 국내 후보 도시 선정이다. 이왕 하려면 가장 전북다운 잔치, 전북만이 할 수 있는 문화올림픽을 기획하여 꼭 성공하는 유산을 남기면 좋겠다. 1998년 김완주 시장 당시 2002년 월드컵 개최 도시로 전주가 선정되면서,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이 오늘날 전주한옥마을과 전통문화관, 전주국제 영화제 등을 시작한 전주 전통문화 중심도시, 한스타일 중심도시 기본구상이었다.
전주한옥마을과 '전주 3재'
2002년 월드컵 사후 평가시에 외국인에게 호평받은 관광상품은 단연 템플스테이였다. 다소 시설이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전통문화 의식주를 그대로 체험하는 일이 지구인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관광요소임을 확인한 계기였고, 이후로 정부의 적극 지원을 받은 템플스테이가 번창하고 있다. 한옥마을 조성 초창기에 한승헌 변호사, 김명곤 장관 등이 앞장선 '천년전주 사랑 모임'의 서울의 명사대상 홍보주제는 '전주한옥마을에서 조선 선비 체험'이었다.
선비 흉내는 도포 입고 갓만 쓴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우리의 우수한 정신문화 유산인 선비 정신을 함께 익혀야 한다. 아무튼 전주의 지역 상징이 된 한옥마을, 자본이 문화를 밀어내는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옥마을과 가장 어울리는 풍경은 '고전번역 교육원'의 글읽는 성독소리다. 전통문화 보존을 목표로 설립된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번역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국역연수원의 최초의 분원이 전주분원이고, 오늘날 법정기관이 된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의 전신이다.
1998년 말 전주시 문화담당과장인 필자에게 당시 전주대 한문교육과 김성환 교수께서 민추 전주분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 필자는 그 가치에 크게 공감하고 즉석에서 전주시가 앞장서서 돕겠다고 말씀드리고, 전주 향교 재산인 시청앞 한식당 3층을 강의실로 확보하고 이듬해 봄에 바로 문을 열었다. 개원 초기 김성환, 김기현 교수, 소강래, 이성우 선생 등 서당 출신 교수들이 강의를 맡았다. 전주분원 개소 덕분에 어린시절 서당에서 기초한문을 배운 필자도 국역자 양성과정에 입학하여 편하게 3년동안 다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고 김성환 교수는 연수원 교육이외에도,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2003년부터는 <전북선현문집해제> 작업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여러 기관에서 호남유학자 문집 번역작업을 위한 기초작업을 미리 해주신 셈이다. 분원의 방학중이나, 전주대에서도 자신의 교수시간 이 외에도 매일 무료로 한문강좌를 평생 해주신 우리시대의 선비셨는데 일찍 가셔서 못내 아쉽다. 전주한옥마을에 다시 울리는 고전 성독소리를 들으면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문화침탈 시기에도 한옥마을에서 정통유학의 맥을 이어오신 '전주 3재'라 불리는 선비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노사학파 흠재 조덕승과 '고창 3재'
근대 유학의 큰 어른인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의 제자로 전주한옥마을을 무대로 강학과 집필을 해온 3인의 유학자를 흔히 전주3재라 한다. <금재문집>을 남긴 전주최씨 금재 최병심(欽齋 崔秉心, 1874~1957), <고재집>을 남긴 전의이씨 고재 이병은(顧齋 李炳殷, 1877~1960), <유재집>을 남긴 여산송씨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1882~1956)을 일컫는다. 이들은 간재의 동문 제자, 동시대 유학자로서 서로 교유하였고, 고재와 유재집안은 사돈관계다.
자칫 온고을은 온전히 사라져버리고 전주판 대장동이 될뻔했던 개발론자들의 재개발 망상을 깨버리고, 한옥마을 경관을 그나마 보존하고 살려낸 것은 김완주 시장의 탁월한 안목이고 전주의 홍복이다. 한옥마을의 진수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재창조 기지여야 한다. 한옥, 한식, 한지, 한복, 한소리, 한글 등 한스타일 산업의 못자리이고 한국 정신문화, 선비정신의 텃밭이어야 한다. 전통문화 침탈의 시대에도 우리문화를 오롯이 지켜온 저력은 천도와 인의를 배운대로 실천해온 선비들의 단단한 마음공부였다. 전주에 간재학파의 전주3재가 있다면, 고창에는 호남의병의 뿌리인 노사학파의 고창3재가 있었다.
호남 유학의 종장은 조선중기의 하서 김인후와 조선후기의 노사 기정진이라 할 수 있다. 두분이 장성출신이라서 '문불여장성'이란 말이 생겨났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수석제자로서 스승과 함께 장성 고산서원에 배향된 창녕조씨 동오 조의곤(東塢 曺毅坤)이 고창 노사학맥의 어른이다. 동오의 손자인 흠재 조덕승(欽齋 曺悳承, 1873~1960)은 조부로부터 가학을 내려받은 뒤에, 다시 노사의 손자이며 호남의병 영수인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1846~1916) 문하에서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 고창의 창녕조씨와 장성의 행주기씨 가문간의 끈끈한 학맥이 이어진다.
조덕승은 고창읍 석정리 내정마을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조부에게 천자문부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익혔다. 21세 때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동문 학우들과 함께 강학하며 서로 지켜나갈 실천요강인 강학규정 수십조를 정하고 스스로 솔선수범하니 동문학도들이 모두 따라서 행했다. 23세 때부터 기우만 선생의 삼산재(三山齋)에 가서 고창 유학 변종혁, 김재종 등과 함께 송사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5세 때 청양으로 면암 최익현을 찾아가 조부 동오선생 묘갈문을 청하면서, 영포대시(影浦臺詩)를 지어 올리니 면암이 그 조부에 그 손자라며 크게 기뻐했다 한다. 1899년 <노사집>편찬에 참여하였고, 조부의 문집인 <동오유고>를 삼산재에서 간행하였다. 최익현과 스승 기우만이 1905년 을사의병 거병시에, 흠재는 노친봉양으로 동참하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하다가,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주경야독의 처사적 삶을 산 강재 조석일
고창 출신 의병장인 포사대장 박도경(朴道京)이 방장산에 은거하며 항일투쟁시에 비밀리에 군량과 군수를 지원하였다. 박도경 의사가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자, 전국의 향교 유림들과 연통하여 고향인 고창으로 운구해오도록 했다. 그의 영구가 장성에서 양고살재 넘어 월암마을에 이르렀을 때 노제를 지내면서, 흠재선생이 고창유림을 대표하여 '대한의사 박도경지구' 라는 명정을 썼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탄식하면서 동오정에서 후진을 강학하는 데 힘썼으며, 창녕조씨 대종회장으로 1920년 정산강당(鼎山講堂), 1922년 삼오당(三吾堂)을 각각 중수하였다. 월산마을에 새 마을터를 일구고 경운장을 지어 교유와 강학의 거점을 마련했다. 학교부지를 기부한 옛 고창동국민학교 교문앞에 '흠재선생 신장명농비'가 있고, 저서로 문인이자 생질인 일재 정홍채(鄭泓采)와 아들 조병후 등이 편찬한 <흠재문고> 9권 1책이 있다.
노사학맥 문인이며 일가, 인척, 사승관계인 흠재 조덕승, 강재 조석일, 일재 정홍채 선생을 고창3재라고 부른다. 흠재의 제자가 강재, 강재의 제자가 일재이고, 강재는 흠재의 집안 아제, 일재는 흠재의 생질이다. 창녕조씨 강재 조석일(强齋 曺錫日, 1886~1969)은 청간공 조서의 후손으로 고창읍 월암마을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공부하며 처사적 삶을 살았다. 집안 삼종형인 오암 조석일과 항렬로는 조카뻘인 흠재 조덕승 양 문하에서 가학을 계승하였다. 성장후에는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 나가서 수학하였고, 최익현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22세 때 <면암선생 연원록> 편찬시에 참여하였고, 23세 때 면암선생 대상을 맞아 제문을 지었다. 50세 때 면암을 대마도까지 수행한 고창출신 독립운동가 지은 최전구 선생의 만사를 지었다. 창녕조씨 대종회장으로 활약하였고, 족보발간에도 힘써 신사파보, 병오파보의 서문을 지었다.
그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정산강당 등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제자들이 돈이나 곡식으로 학채를 내면 간단한 예물 정도 이외에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경독론(耕讀論)에서, "밭갈기와 글읽기는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다. 글공부만 하면 굶주려 살아갈 도리가 없고, 농사일만 하면 예와 의가 막혀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 ... 모름지기 낮에는 나가서 밭갈고 밤에는 들어와 책을 읽어서 동중서처럼 성헌의 도를 실천할 일이다." 고 논하면서 영농과 공부의 병행을 역설하였다. 고창지역 석학인 신현중, 김재종, 이규찬, 김상흡, 유춘석 등과 시회를 하며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강재유고> 3권 1책이 있다
고창 마지막 서당 월산서당과 일재 정홍채
고창지역의 마지막 서당 월산서당에서 80년대 초까지도 강학한 분이 일재 정홍채(逸齋 鄭弘采, 1901~ 1982)선생이다. 하동정씨인 일재는 장성 광암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고봉 기대승의 문인으로 고창현감을 지낸 하곡 정운룡(霞谷 鄭雲龍)의 후손이다. 정홍채는 어려서 부친 정순영을 따라 외가인 동오정이 있던 고창읍 내정마을(현재 석정골프장 안내소 주변)로 이사를 왔다. 외숙인 흠재와 처종조부인 강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총명하여 15세에 고전의 네 부류인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다 읽고 통하였다 한다. 장성한 후에는 원근의 석학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식견을 넓혔고, 외숙 흠재선생이 월산마을 새 터를 닦을 때 함께 이사하여 월산서당을 열어 종신토록 후학을 길렀다. 문인으로 유용상(柳龍翔), 강천수(姜天秀), 김영회(金永會) 등 수십 명이 있고, 저서로 <일재유고(逸齋遺稿)> 3권 3책이 있다. 남긴 글 중에 '경의강설(經義講說)'은 그가 일생 동안 공부한 주자대전, 율곡전서, 황극경세서, 이정자서,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과 이기심성론 등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덧붙인 글로, 정홍채 학문의 정수를 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창의 유학)
고창 3재가 가신지 반백년 만에 호남의병 노사학맥의 한 거점이던 석정온천 동오정 계곡을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골프장을 지었다. 어릴적 필자의 눈에 비친 동오정과 내정계곡은 한국전통 원림의 풍광을 지닌 절경이었다. 골프장을 설계하면서 누군가가 조금 비용이 들더라도 동오정 정자를 살려두고 그늘집으로 활용할 궁리를 했더라면, 가장 한국적인 전통미를 지닌 그늘집으로 세계건축잡지에도 소개되었을텐데 참 아쉽다. 선비들의 인문학과 풍류예술 무대인 아름다운 정자들이 무관심 속에 썩어 무너져 간다.
수천년 동방예의지국의 명예를 지켜온 선비정신, 망국의 위기때마다 나라를 구한 의병정신도 함께 스러져 간다. 최고 대학을 나온 법조정치꾼 괴물집단이 법꾸라지 지식을 방패삼고, 인간의 최소한의 양심과 분별심마저도 버리고, 극좌 극우의 내로남불 이념전쟁에 불을 질러 나라를 아예 불태우려 한다. 옳고 그름도 정의와 불의도 분간하지 못한 채, 염치와 부끄러움마져 내팽개친 정치모리배들에게 이 나라를 더이상 맡길 수는 없는 지경이다. 건전한 양심과 상식과 합리성을 가진 우리 시민들이, 다시 불의를 물리치는 선비정신으로 대한민국 국가대개조 의병운동에 나서야 할 때다. 나아갈 때와 처할 곳을 분명히 하고 지행합일을 실천해 온 선비들의 출처 정신이 다시금 그리운 시국이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