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다시는 탄핵 당하지 않을 대통령이 탄생하는 해가 되길

이화구의 '생각 줍기'

2025-01-30     이화구 객원기자

2024년 갑진년(甲辰年)을 보내고 새로운 2025년 을사년(乙巳年)을 맞이합니다. ‘갑진(甲辰)’이니 ‘을사(乙巳)’니 하는 것은 ‘간지(干支)’를 이르는 말인데, 단어가 주는 느낌이 새해는 지난해에 비해 ‘갑(甲)’에서 ‘을(乙)’로 내려가는 느낌이고, ‘띠’도 ‘진(辰)’ 즉 용(龍)에서 ‘사(巳)’ 즉 뱀(蛇)으로 등급이 한참 떨어지는 것 같고, 발음상으로도 ‘값진’ 해에서 ‘을씨년스런’ 해로 나빠지는 거 같아 느낌상으로도 별로 좋아 보이는 것 같지 않고, 또한 역사적으로도 120년 전의 치욕스러웠던 을사년을 생각나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룡(靑龍)의 해인 2024년에는 정신 나간 흑룡(黑龍) 한 마리가 청룡(靑龍)의 탈을 쓰고 정치권과 국민을 상대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갑(甲)질을 해대는 바람에 이 나라는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면서 경제, 외교, 국방 등 모든 면에서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여 값져야 할 갑진년(甲辰年)은 이름값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느낌상 ‘갑진년(甲辰年)’만은 못 하지만 ‘을사년’에는 겉만 화려했던 미친 흑룡(黑龍)은 떠나보내고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동물인 뱀(蛇)의 지혜로 사람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 영광된 한 해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유가(儒家)에서는 임금에게 덕(德)이 부족하면 하늘에서 삼재팔난(三災八難)의 재앙을 내린다고 하였고, 불가의 초기 경전인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정치 사회적 위계질서의 정점인 통치자의 영향력은 사회는 물론이고 생물적 내지는 물리적 차원까지 영향을 미쳐, 해와 달이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되어, 바람도 바르게 불지 못하고, 비도 바르게 내리지 못하고, 따라서 곡식도 바르게 익지 못하여 결국 질병이 발생하여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개인적으로 설날 연휴 첫날에 1500년 된 어느 사찰을 방문하여 적멸보궁에 참배하는 도중에 적멸보궁 문살 사이에 핀 상서로운 꽃으로 불가에서 신성시하는 ‘우담바라꽃’이 꽃망울을 터뜨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났습니다. ‘우담바라(Udumbara, 優曇婆羅)’는 산스크리트어로 ‘행복을 가져오는 꽃’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불가의 경전에는 “평소에 나무만 있고 꽃이 없다가 3000년마다 한 번 피거나, 또는 부처가 세상에 태어날 때와 무력과 권력을 쓰지 않는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큰 성인이 나오면 감득해서 꽃이 피어나 세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우담바라’로 알려진 이런 것들은 주로 봄과 여름에 발견되는 ‘풀잠자리알’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스님들과 진위를 놓고 격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엊그제 세모에 발견한 ‘우담바라’는 한겨울에 핀 꽃이라 곤충의 알은 아닌 것 같고, 눈 내리는 습한 겨울에 생기는 미세한 곰팡이의 일종이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

우담바라나무가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는 나무의 키가 20~30m가 될 정도로 크면서도 나무 몸통과 가지에 송이를 지어 열매가 열리며 나무 자체뿐 아니라 꽃 그리고 열매 모두를 ‘우담바라’라고 부르며, 인도 대륙과 동남아시아, 호주 대륙까지만 분포하고 있으며, 한중일 3국이 위치한 동북아시아에는 없다고 합니다. 우담바라나무는 겉으로는 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그저 열매만 달려있는 듯하여 꽃이 피지 않고 과실이 달린 것 같아 우리나라의 무화과나무와 비슷한 모양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우담바라’는 해마다 2-3일 정도 밤에 피는 꽃으로 이 꽃은 밤에만 피기 때문에 꽃을 보기가 매우 어려워 천복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담바라’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찾아보니 불교의 많은 경전(화엄경, 법화경, 무량수경,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에서는 “희귀하고, 귀한 것에 비유할 때 ‘우담바라’가 나오고, ‘우담바라’는 공기 속에서 피어난 꽃으로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은 보기가 어렵고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꽃이 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가에서는 왜 풀잠자리알을 ‘우담바라’라고 주장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니 종교적인 대상으로서의 ‘우담바라’와 생물학적 실체로의 풀잠자리 사이에는 뭔가 얽혀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풀잠자리는 알을 식물의 잎이나 줄기 같은 곳에 낳는데 알을 낳으면서 긴 줄기를 세우고 그 끝에 알을 붙여 매달아 놓는데, 언뜻 보면 하얀 긴 꽃대 위에 매달린 작은 꽃송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세한 버섯과 같은 균류의 곰팡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 인도의 우담바라나무는 꽃을 피울 때 열매처럼 생긴 꽃받침 속에서 암꽃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그 모습이 우리나라 풀잠자리가 식물의 잎이나 줄기 같은 곳에 낳은 알의 모습과 서로 흡사해서 한국의 풀잠자리알이 인도의 우담바라를 대신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찮게 여기는 벌레의 알이 과연 불교의 징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요즘은 곤충이 한낱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류 문화사 속에서 오랫동안 곤충이 신이었거나 신적 대리물로 추앙받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에서는 적어도 천 년 이상 ‘소똥구리’가 태양신으로 모셔졌고, 힌두교에서는 연꽃 위에 앉은 ‘꿀벌은’ 비슈누(Vishnu) 신을 나타내고, 그리스도교에서 ‘나비’는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풀잠자리 알의 경우에는 본래 인도지역에 존재하는 ‘우담바라나무’의 꽃이 아니라, 그 식물이 분포하지 않는 동북아 지역에서 그 식물의 꽃을 풀잠자리의 알이 대신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마다 자신의 상징물이 발상지에만 존재하고, 전파된 곳에는 상징물이 없는 경우 가장 유사한 대용물을 채택하는 것은 관례일 수도 있습니다.

추측해 보건데 오랜 역사 속에서 인도 현지에 있고 동북아 지역에 없는 ‘우담바라’를 보고 왔거나 또는 책자로 접한 불자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모습을 찾았으리라 봅니다. 그것이 바로 풀잠자리의 알이었을 것이며, 가장 근사한 대용물로 인식된 풀잠자리의 알이 그 이후 지금껏 ‘우담바라’의 상징적 가치를 계승해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 풀잠자리 알이 실제 인도의 식물인 ‘우담바라’의 꽃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염원을 담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우담바라’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 핀다는 상상과 전설의 꽃으로 상서롭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고, 3천년 만에 한 번 핀다고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대한민국의 유명한 사찰에서 한겨울에 ‘우담바라’가 발견되었으니 전륜성왕 정도의 완벽한 통치자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다시는 탄핵 당하지 않을 정도의 대통령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사진: 이화구(CPA 국제공인회계사·임실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