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새해, '국가 대개조'의 호기...함께 잘 사는 나라 되길 간절히 기도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70)
을사년 신새벽에 대한민국의 화합과 국운 융성을 간절히 빈다. 지구촌의 구석에는 오늘도 빈곤과 기아,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다행히도 한국은 역사상 물질적으로는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누린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내로남불 양극단 정치로 편가르기, 집단 이기주의, 빈부 격차, 승자독식의 숫자 사회의 폐해가 공동체를 무너뜨릴 위협 요소가 되고있다. 요즈음 뜨는 한류로 우리 겨레의 문화적 잠재력이 모처럼 빛을 보기 시작하여 퍽 다행이다. 한국인의 고운 마음씨가 낳은 지구상생 사상이 담긴 한류, 탁월한 전통문화의 가치가 한동안 불행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도구로써 빼어난 우리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왜곡시킨데다가, 뿌리깊은 중화사대의식, 서구우월주의의 최면에 걸려 우리 스스로도 자기 비하의 식민역사관 학습을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한류하면 의례히 케이팝부터 한국 소리, 음식, 한지, 한옥, 한복, 태권도 등 이른바 한스타일을 말한다. 그러나 한류의 끝판왕은 소멸위기 지구를 살릴 환경생태사상인 천지인합일사상, 지구촌을 함께 잘 살게할 자리이타의 홍익 상생사상 같은 한국의 아름다운 뿌리사상이어야 한다. 천지 자연만물을 생명체로 인식하는 천지인합일 풍수사상은 온난화로 생존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릴 대안사상이다.
건국이념과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내건 나라가 고조선이고 한국이다. 상생문화의 아름다운 힘으로 나와 함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고상한 건국이념, 교육 이념을 가진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또 있었는가? 우리 고대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방식은 편가르기식 선거가 아니라, 숙의와 토론을 통한 만장일치제 추대방식이었다. 여러 부족세력들이 대화로써 양보와 타협을 이루어내서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던 탁월한 통치제도였다. 고구리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같은 중도타협 협상정치 덕분에 삼국은 수백년간씩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장 대립이 극심할 사상 종교문제까지도 우리는 늘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너그럽게 포용하고 서로 장점을 배우면서 유불선회통, 유불선합일의 상생관계를 유지해왔다.
구한말 문화적 배경이 근본적으로 다른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도 문화적 충돌을 회피하고자, 한국인 특유의 포용과 창의문화로 슬기롭게 해결한 아름다운 사례가 ㄱ자교회의 슬기다. 서양식 가방에는 규격에 맞는 물건만 들어가지만, 전통의 한국문화는 모든 사상과 종교까지도 감싸주고 융합하는 품이 너른 보자기문화, 포용문화다. 고인돌시대 한반도 문명수도였던 고창은 시대를 초월하며,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면서 다문화를 절충하고 재창조하는 전통을 이어왔기에 한반도 문명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고창식 고인돌, 포용 상생문화의 결정체
고창의 별칭으로 '한반도 첫 수도 고창'이라 부르는 첫째 증거가 세계 최고의 고인돌 유산이다. 지구촌 고인돌의 약 7할이 한민족이 만든 것이라는데, 호남의 고창군에 가장 수도 많고 다양한 앙식들이 있다. 현재 지정 또는 비지정, 조사보고된 고인돌이 대략 2,000여기이고, 미조사 고인돌, 개발과정에서 중장비로 파묻어버린 고인돌이 1,000여기 정도로 추산되므로, 대략 총 3,000여기로 추정된다. 이토록 많은 고인돌을 남긴 것은 그만큼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사람이 많이 모여든 까닭은 먹을거리가 많았을 터이고, 이방인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고창의 포용문화 덕분이었으리라.
타 지역에 없는 양식인 이른바 고창식 고인돌, 고창 사람이 고창식으로 재창조한 독특한 양식의 고인돌이 많은 연유가 바로 포용성이다. 이른바 해양식, 남방식은 남쪽 해양문명권 사람들이, 대륙식, 북방식은 북방문화권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각자가 자기 종족이 하던 방식으로 축조했을 것이다. 고창 사람들은 각지에서 모여든 여러 종족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 그들의 장점들을 취하고, 고창의 풍토에 알맞게 절충하고 재창조하여 다양한 유형의 고창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양한 고칭식 고인돌은 다문화의 포용흡수와 문화재창조 역량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바다와 내륙를 통해 수입한 다양한 문명을 포용하는 고인돌시대의 전통은 마한시대로 계승된다. 고창 고인돌 집적지인 봉덕리, 매산리 일대를 중심지로 세운 나라, 마한의 수도라는 뜻을 지닌 고창 모로비리국은 동아시아의 국제해상국가였다. 흔히 마한왕릉으로 부르는 봉덕리 1호고분에서 출토된 고급 위세품 유물을 보면 동아시아 지중해의 칠산바다와 인천강을 잇는 뱃길을 통한 한중일 교역의 중심지가 고창지역이었음을 웅변해준다. 특히 '작은병이달린주둥이가넓은작은항아리,소호장식광구소호 小壺裝飾廣口小壺'를 살펴보면, 같은 소호인 중국식과 일본식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절충하고 변형하여 가장 세련미와 균형미가 돋보이게 재창조한 고창식 소호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물자료를 볼 때, 봉덕리 주변의 마한 분구묘와 집자리를 축조했던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폭넓은 국제적 교류를 통해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도 세력을 확장해온 것을 알 수 있다.(최완규, 모로비리국의 국제성 )
노사, 면암, 간재학파가 상생하는 '화이부동'
고창의 포용 문화 특성은 고창 유학의 화이부동과 일제강점기 남고창 북오산으로 드날리던 고창고보의 학풍에서도 볼 수 있다. 조선후기 고창지역의 유학은 타지역처럼 하나의 주류학파가 주도하지 않고, 크게 보아 노사 기정진, 면암 최익현, 간재 전우의 삼대 유학자의 학풍이 각각 들어와 전승되어 온다. 각 학파의 특성은 지켜나가되, 서로 배척하지 않고 신의로 교유하면서, 고창식으로 절충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지행합일을 실천해 온 것이다. 19세기 이후 호남 유학의 산맥을 이룬 노사학맥으로는 노사의 수석제자(고제高弟)로서 스승 노사와 함께 고산사에 배향된 고창읍 석정출신 동오 조의곤(東塢 曺毅坤1832~1893)을 비롯하여 손자인 흠재 조덕승, 한말의사인 용오 정관원, 일광 정시해 등으로 의병참여가 많았다.
면암 학맥으로는 신림 도동사에 배향된 신림면 가평출신 수남 고석진(秀南 高石鎭 1856~1924)을 비롯하여 파리장서 서명한 송천 고예진, 지은 최전구 의사 등으로 의병과 파리장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간재학파로는 간재를 시종하여 모신 6인제자에 포함되는 고창읍 주곡출신 현곡 유영선(玄谷 柳永善1893~1961)의 현곡정사를 중심으로 간재학맥이 이어져, 홍종호, 신사범, 유호석 등이 이었다. <고창의 유학(유풍연 대표집필)>에 수록된 유학자 중 3대학파는 노사학맥이 29인, 면암학맥 17인, 간재학맥 11인 등으로 나타나고 여타는 송시열, 윤선거, 송병선, 연원불명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양한 사승관계로 여러 학파의 학문이 함께 고창지역에 수용되었지만, 군자의 사귐인 화이부동으로 고창 유학을 발전시켰다. 다학파 포용 융합과 화이부동 문화가 고창 유학의 특장점이라 할 수 있다. 고창 유학의 포용적 학풍이 일제강점기 민족사학 고창고보에도 이어졌다. 초창기 졸업생 출신지를 보면 절반 이상이 전북이외의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 등 전국에서 유학을 왔다. 특히 타지역에서 민족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도 다 받아주었다. 1937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전주 신흥학교 전교생 200여명을 흔쾌히 수용하기도 했다. 당시 고창고보도 재정 시설여건이 어려웠지만 같은 항일운동을 했던 학생들을 대승적으로 포용한 것도 고창의 포용문화 발로의 일환이다.
을사년 새해...함께 잘 사는 나라, 포용하는 대한민국 되길 간절히 기도
판소리의 발상지 고창은 동리 신재효 이전부터 농촌과 무가에서 전승되던 영무장 농악이 꽃피던 땅이었다. 최근에 사라질뻔한 고창농악을 살려내서 문화재로 지정받아 명맥을 잇고, 고창농악전수관을 호남우도농악 으뜸 배움터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명훈 관장의 피땀어린 헌신덕분이다. 이명훈 상쇠에 의하면 호남농악중에서도 고창농악은 간이 잘 맞아서 감칠맛이 난다고 한다. 북녘의 바삐 달아나는 빠른 가락인 익산농악과 남녘의 늘어터진 목포농악의 중용을 취하고 절충하여 맛깔나게 고창식 농악으로 재창조한 덕분이다.
고창은 조경업계에서 소나무 조경수의 수도로 꼽힌다. 고창의 첫 인상을 품격있는 소나무 가로수길과 명품 소나무 풍경을 꼽는 이가 많다. 사실 청와대 녹지원 소나무도 고창산이고, 서울의 주요건물 상징 소나무 중 상당수가 고창산 소나무다. 서울시가 남산지역을 정비하면서, 애국가에 나오는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하는 '남산위의 저 소나무' 상징을 찾아 전국을 뒤진 끝에 고창 소나무를 선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미네랄과 유효미생물이 많은 황토와 해풍 덕분에 고창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하여 잘 살고, 고창농악을 듣고 자라서 멋들어지게 휘어진다. 특히 호남의 중간지역이라서 남녘이든 북녘이든 시집간 고창 소나무는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서 잘 살아남기에, 조경전문가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중용과 포용의 고창 땅을 닮은 고창소나무의 덕성이다.
좌든 우든 치우침이 극하면 망하는 게 하늘의 이치다. 정치와 타협과 협상은 서로 양보하며 가운데서 만나는 게 비결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면 민주시민이 아니다. 획일적 일사불란을 강요하는 정당은 나치즘 파시즘이지 민주 정당은 아니다. 라이벌은 죽여야할 적이 아니라 나에게 긍정적 변화를 주는 진정한 친구다. 나와 신념이 다르거나 중도협상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사쿠라로 수박으로 낙인찍어, 갈라치고 편가르고 혐오하는 양극단의 팬덤정치를 끝내지 못한다면 정치 발전은 요원하다.
이장이든 군수든 대통령이든 공직을 맡은 자가 선거공학으로 편가르기 하는 것은 공동체를 깨뜨리는 가장 큰 죄악이다. 뭇생명들도 이종교배가 건강하게 살아남고 순혈주의는 결국 도태된다. 한민족의 빛나는 상생문화, 고창의 절충과 포용문화가 국가 대개조의 호기인 을사년 새해에 한껏 발휘되어 함께 잘 사는 나라, 포용하는 대한민국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