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은 왜 '청사(靑蛇)의 해'일까?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69)
청룡이 청사로 담넘어가는 갑진년 세모다. 구세군 자선남비로 시작하여 성탄과 연말연시 행사로 분주한 연말인데, 올해는 난데없는 계엄탄핵으로 국민들이 길거리에서 나라걱정하는 비상시국이다. 그래도 희망으로 맞이할 을사년 푸른 뱀띠 해는 어김없이 온다. 왜 하필 푸른 뱀띠 해일까? 우리 겨레는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오방색으로 청, 홍, 황, 백, 흑색을 들고, 오행에 알맞게 오륜, 오미, 오방 등을 정했다.
청사처럼 스스로 허물 벗고 기회 포착하는 을사년
친근한 동물인 12개의 띠 중에 뱀띠 해 을사년은 천간 중 갑과 을이 오행상 목성인 청색이므로 푸른 뱀이 되는 것이다. 같은 뱀띠라도 오방색에 따라 정사년은 홍사, 기사년은 황사, 신사년은 백사, 계사년은 흑사가 된다. 을사년 하면 우선 을사의병, 을사늑약, 을사오적, 을사사화 등 굵직한 역사적 비극이 떠오른다. 새해 을사년의 운세는 천간과 지지가 겉으로는 목생화로 상생이지만, 속을 잘 들여다 보면 복잡한 갈등 관계도 엿보인다. 어디 역사의 비극이 하늘 탓, 운세탓이랴? 개인의 사주팔자도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따라 운이 열리듯이, 국운도 국민들 집단지성의 발휘와 공공심으로 헌신하는 지도자들의 구실하기에 달려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서양에서는 뱀을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게 만드는 사탄으로 그렸다. 한편 성경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는 말씀처럼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그리기도 했다. 우리 겨레는 뱀을 지혜와 다산, 재물과 풍요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집구렁이는 업이라 하여 집안의 신주처럼 모시기도 했다.
서민들이 많이 보던 당사주에서도 뱀띠는 문창성이 있어서 지혜롭고 공부 잘하고 관운도 있다고 한다. 뱀을 신성시하여 해치면 동티난다고 하는 속설이 전승되서, 고창지역의 학교마다 소풍날 비만오면 소사 아저씨가 구렁이 잡아서 비온다는 이야기가 흔했다. 고구리 고분벽화 현무도는 뱀과 거북이 교미하는 그림이고, 삼실총의 뱀이 교미하는 그림 교사도도 다산과 풍요를 기원한 상징이다.
푸른 뱀처럼 달리는 고창의 뱀 이야기
고창에도 뱀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다. 고창을 노래하는 대표적 시가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창읍지>에 수록된 고려말 대제학을 역임한 이행(李行 1352~1432)의 한시가 있다. "시냇물은 마치 푸른 뱀이 달리듯 흐르고, 산봉우리는 파아란 병풍을 두른 듯 하구나溪水靑巳走 峯巒翠障橫". 고위관료출신 나그네 문인 이행은 고창의 산수를 평하면서 물줄기는 푸른 뱀처럼 흘러가고, 사방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녹수청산으로 고창의 첫 인상을 그림처럼 묘사했다. 높을고창의 뱀명당으로는 무장읍성과 해리 사반리가 유명하다.
무장읍성 객사뒤의 사두혈이 무장현의 혈맥이므로 이곳 뱀머리 명당에 객사인 송사지관 터를 잡았고, 뱀의 먹잇감으로 영선고 자리에 개구리 바위, 읍성 북쪽 여단터 뒤에 황새산(한제산)을 두어 3수부동격으로 설계한 뱀명당 무장읍성이다. 먹이사슬 관계인 세 동물 개구리, 뱀, 황새가 서로 먹지도 못하고 긴장하며 노리고 있어서 생기가 왕성하다는 풍수형국이다. 산과 땅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우리겨레의 고운 심성인 생명공생 사상이 담겨있는 풍수사상 체계다. 마을로는 광주이씨 집성촌인 해리면 사반리가 대표적이다.
뱀이 또아리를 튼 모양의 명당이라서 사반(巳盤)인데, 같은 모양의 형세인데도 규모가 더욱 크면 뱀대신에 용을 써서 용반이나 반룡이 된다. 뱀과 물고기도 덕을 쌓고 노력하면 용이 된다는 사자성어인 어변성룡(漁變成龍)을 따와서, 사반마을 옆마을이 어룡마을이다. 사반마을 뱀, 논가운데의 개구리섬, 앞산 원당산이 황새에 해당하여 사반리도 삼수부동격 뱀명당이다. 사반리 출신 인물로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 구명상소의 대표로서 인산사에 모셔진 광주 이씨 우천 이약수, 현대에는 전 세종시장 이춘희, 전 대상그룹 신선식품 대표 이문희, 전 덕진구청장 이진수, 전 무장향교전교 이정수 등이 있다.
성송면 괴치리의 사천마을도 지금은 행정지명상 모래사자 사천(沙川)으로 쓰지만, 본래 마을 백호쪽에 뱀명당 사두혈이 있었고, 배산임수인 마을앞 덕림천이 사행하천이라 뱀내라 불렀던 사천巳川이다. 마을은 뱀냇골로 불렸고 위독한 아버지를 신선이 알려주신 비약인 뱀의 알을 구해 살려냈다는 뱀냇골 효녀이야기가 전승되는 마을이다.
명필 이삼만이 전북의 뱀을 다 퇴치했다고?
고창의 산하를 청사로 묘사한 시구처럼, 푸른 뱀 기운 덕분인지 고창의 대표 시인들도 뱀노래 시집으로 출세한다. 시의 정부, 우리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미당 서정주의 처녀 시집은 꽃뱀인 < 화사집>이다.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고창출신 김근 시인의 첫시집 제목도 <뱀소년의 외출>이다. 아마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못하는 사복巳福을 뱀소년으로 풀어낸 듯하다.
고창지역 정월초의 세시풍속으론 뱀방, 뱀축, 비암방, 뱀뱅이라는 풍속이 있다. 새해 첫 뱀날인 상사일에 이삼만, 청사, 백사, 흑사, 홍사, 황사라는 글씨를 써서 주춧돌 윗쪽 기둥에다 붙여두면 한 해 동안 뱀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풍습이다. 뱀의 이름이야 그렇다치고 명필 이삼만의 이름만 보면 뱀들이 도망간다는 속설이 특이하고 재미있다. 고창읍성 공북루 현판을 쓴 조선후기 명필 창암 이삼만은 독특한 자신의 서체인 유수체(流水體)를 창안했다. 마치 물이 흘러가듯이 뱀이 기어가듯이 붓놀림이 경쾌하며 부드러운 글씨체다.
특히 그의 대표작품인 산광수색(山光水色)은 네 글자를 각각 다른 뱀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산자는 또아리튼 뱀인 반사(盤巳), 광자는 먹이를 낚아채려 뛰는 뱀 약사(躍巳), 수자는 목을 처들고 노리는 뱀 탐사(眈巳), 색자는 하늘로 승천하는 뱀 비사(飛巳)를 각각 나타냈다. 명필 창암은 소년기에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려죽는 참화를 겪고나서, 뱀만 보면 다 잡아죽인다는 속설에서 낳은 민속이 호남지방의 뱀방으로 보인다. 자신의 글씨에도 뱀의 여러 형상을 구현해낸 것을 보면, 어릴적 독사에게 죽은 부친의 트라우마를 긍정적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창암의 내공이 엿보이는 서체다.
양극단정치 허물 벗고 대한민국 대개조 원년으로
뱀이 잘 크려면 움츠려 인내하는 겨울잠도 자고,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탈피해야만 한다. 뱀의 탈피는 자기 혁신의 상징이다. 우리 선인들은 날마다 자기혁신을 하고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좌우명으로 삼고 수양에 힘썼다. 인생이나 공직에서도 흠없이 허물없이 살고자 끊임없이 조심하고 두려워했다. 주역에서도 조심해야 허물이 없다는 경계가 자주 나오는 까닭이다. 을사년 국운을 주역으로 개관하면 택수곤(澤水困)괘다. 못에 물이 말랐으니 곤궁하다. 한자 곤할곤困은 사방이 막힌 나무 신세처럼 팍팍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도자는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룰 각오(致命遂志)를 해야한다. 상황이 변화되면 택지췌(澤地萃)괘로 바뀌니, 모을 췌(萃)는 집단지성으로 국론을 모으는 형세다. 지도자는 안보를 강화하고 잠재 위협 요소를 경계해야 한다. 국론을 잘 모으고 중도를 지키야 길하므로 허물이 없다.
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도자의 헌신, 국민들의 집단지성이 잘 작동하면 낡은 허물을 벗고, 바람직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탄핵정국을 기회로 삼아 심리적 내란 상태인 좌우 극단정치를 탈피하고, 중도에서 대화와 타협이 일상화하는 중화정치, 대동사회를 회복해야 한다. 내친 김에 농민생명헌법, 공생경제헌법, 내각제 권력구조 개편 등 새로운 대한민국 제7공화국헌법 마련이 긴요한 국정과제다. 집권경쟁과 당리당략을 탈피하고, 오직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룰 절호의 기회다.
개인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긍정적 마음가짐과 끊임없이 스스로 힘쓰는 삶의 태도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ᆢ 지도자가 무능하고 국론이 분열되고 위기 대응에 실패하면, 을사늑약처럼 비극의 역사가 반복된다. 매년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김난도 교수도 올해는 뱀처럼 슬기롭고 유연하며 신속한 뱀감각을 강조한다. 명필 이삼만 글씨 속 사시탐탐(巳視眈眈)의 뱀처럼 사방을 잘 살펴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기회가 오면 잽싸게 목표를 포착하는 역동적인 한국인에게 국운이 크게 열릴 2025년 을사년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한류문화의 주역인 젊은 신세대들이 촛불시대를 승화하는 응원봉문화 새시대를 훌륭하게 열면서, 한국인의 무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국민들이 촛불기도로 마련해준 국가 개조의 절호의 기회를 집권의 단맛에 취하여 놓처버린 역사적 과오를 다시금 반복한다면 비극이 또 온다. 수십만이 모인 시위축제 현장에서 함께 나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는 동방예의지국 후예들의 집단지성이 슬기롭게 발현되며 맞이하는 을사년 새해아침이다. 을사년에 제 목숨을 바쳐 국가 대혁신에 나설 성인은 누구실까? 희극의 역사로 새롭게 재탄생할 대한민국의 무궁한 국운을 빈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