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도덕국가 다시 세우는 '을사년'을 간절히 염원하며"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68)

2024-12-22     유기상

오늘날 '동지 팥죽'을 먹는 날 정도로만 인식하는 동지 섣달의 동지를 또 맞이했다. 동지는 작은 설날(아세 亞歲)로도 불렸듯이 천문학적인 새해다. 성탄절도 본디 천문학적으로는 서양의 동지개념의 새해 시작점이었다. 이맘 때면 의례 다사다난했던 한 해, 희망찬 새해라는 말로 연말연시를 맞는다. 끝은 곧 시작이라는 생각, 끝도 시작도 없이 우주와 역사는 영원하다는 개념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한가지다. 한국 전통문화의 뿌리 사상인 '천부경'이나 '주역'의 시작과 끝이 하나이고, 서양의 알파와 오메가도 그렇다. 졸업과 시작을 동시에 뜻하는 영어단어 커멘스먼트(commencement)의 어원도 끝과 시작을 함께 말한다는 뜻이다. 인디언 달력 동짓달의 '모두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은 캄캄한 칠흑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들기 시작하는 상태, 밤이 가장 긴 동지무렵을 상징하는 주역의 '지뢰복(地雷復)' 괘와도 일맥상통한다.

익산 출신 국민가수 최진희는 밴드와 보컬을 거치며 다져진 탄탄한 기본기 위에 호소력 넘치는 폭발적 가창력으로 1980년대 가요계의 정점에 섰고, 수많은 대중 히트곡을 내면서 한국가요사의 한 쪽을 쓰고있는 명가수다. 그의 인생곡인 '사랑의 미로'가 빅 히트하면서 1985년에는 1년 내내 '가요 톱 텐'에 들기도 했다.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최진희의 창법도 좋지만, 서정적인 노랫말도 감미로운데 절창은 역시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미로여" 후렴대목이다. 작사가 지명길의 내공이 낳은 명구다. 우리네 인생도 우주도 사랑도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것이란 생각에 미치니, 남북을 초월한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백제고도 익산 '건자산'과 '알파 오메가'

매년 다사다난한 연말연시를 맞았지만, 특별히 올해 세밑은 온 국민들이 나라 걱정으로 지샌다. 현대사의 또 하나의 큰 불행을 낳을 뻔한 군사정변을 성숙한 국민들의 연대의 힘으로 막아냈다. 을사년 새해에 끝도 시작도 없이 전개될 온갖 변화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소위 정치 지도자란 사람들의 양심과 공심, 공공심의 발휘가 절실하다. 역사 앞에 늘 바로서고자 고뇌하던 백범 김구가 해방뒤 귀국하기 전날밤에 경구로 쓴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의 마음 가짐도 그런 것이리라. 온갖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끝까지 지키고 갈 불변의 가치, 공공심, 때에 알맞는 시중(時中), 중화(中和)의 가치관을 확고히 지키면 모든 위기속에서도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역의 마음가짐이다.

마한 54소국 중 고창의 모로비리국과 익산의 금마국은 지명에 바로 수도라는 우리말 뜻이 담겨있다. 익산은 금마국의 진산인 건자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흐르는 옥룡천, 부상천, 왕궁, 제석사, 고도리, 견우직녀상, 춘포, 봄개 등 주위지명이 모두 역사상 네번이나 수도를 했던 터답게 수도를 상징하는 고품격 인문학 지명으로 되어있다. 특히 금마의 진산인 '건자산(乾子山)은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라고 여지승람에 기록되었고, 대동여지도에도 건자산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1872년 지도에는 '건지산(乾支山)'이라 잘못 쓰여 있는데, 건자산의 의미를 잘 모르고 쓴 게 분명한 오기다. 건자산은 처음과 끝, 시작과 끝을 의미하므로 끝없는 우주순환, 절대왕권, 수도의 영세불멸의 뜻을 함축한 것이다. 묘하게도 건자산 바로 앞에 자리잡은 교회당 건물에도 기독교 상징인 알파와 오메가가 새겨져있다. 건자산과 교회탑에 새긴 알파와 오메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알파와 오메가는 동서고금을 초월한 같은 뜻이다.

건자산의 건은 동양철학 윤도의 24방위 중 마지막 방위인 북북서방인 건해(乾亥) 중 천간인 건(乾)과 첫째 방위인 정북방 임자(壬子) 중 지지인 자를 결합하여 건자산이라 한 것이니, 끝과 시작점 곧 태극을 의미한다. 희랍어 알파벳 첫 글자 알파(Α)와 끝 글자 오메가(Ω)는 창조주께서 자신을 지칭하신 말씀이다.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는 우리가 세속에서 쓰는 ‘시작과 끝’보다 더 신앙적이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1ㆍ8). 고조선 준왕의 기준성, 마한 금마국, 고구리 보덕국, 백제 무왕시대의 왕도로서 역사상 네번이나 수도를 했던 금마의 진산 건자산이나, 성경속의 알파와 오메가가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역사를 말한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하다.

끝도 시작도 없는 '주역'의 마음

동양 고전의 우주론과 철학사상을 압축했다는 책 주역의 끝과 시작도 한가지다. 우주만상의 변화 모습을 상징하는 주역 64괘 중 첫째괘는 하늘을 형상하는 건괘다. 하늘 땅이 있기에 만물이 생긴 까닭이다. 천지창조다. 마지막 63은 수화기제(水火旣濟), 64는 화수미제(火水未濟) 괘로 끝난다. 수화기제는 물이 불위에 있는 형상으로 요리도 할 수 있고, 다리는 따뜻하고 머리는 차니 건강에도 좋고 성공하는 형세다. 그러나 성공에 자만하다 보면 곧 어려움이 닥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잘 나가는 태평시에 미리 대비하여 미래의 환란을 예방해야 한다고 경계한다.

그 다음 64번째 마지막은 변화의 요소인 물과 불의 위치가 결제가 잘 이루어지던 수화기제괘와 반대로 바뀐 화수미제괘이다. 성공하는 기제에서 결제가 안되는 미제, 사건이 해결이 아니되는 미제괘를 끝에 놓은 것이다. 공자는 "어떤 일도 끝까지 지속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좋은 환경인 기제 다음에 어려운 상황인 미제괘로 끝맺음한다."고 했다. 하나를 이루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출발하라는 교훈이다. 불이 물위로 바뀌는 화수미제괘는 항상 나쁜 것인가?

아니다. 지도자는 상황판단을 신중히 하고 질서있게 정돈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고정된 것 없이 영구순환하기 마련이다. 위기 속에 기회도 있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하늘을 감동케 할 만큼 항상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사람을 하늘은 돕는다는 것이다. 한 해의 끝에서 각자가 있는 위치에서 하늘 마음으로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하늘의 도이자 사람의 길이다.

끝도 시작도 없는 '천부경'의 겨레 마음

우리 겨레의 지혜경전이자 한국 전통 철학사상을 압축한 <천부경>은 가로 세로 아홉 글자씩의 한 상자 속에 81자로 새겨져 전승되었다. 숫자 1로 시작하여 숫자 1로 끝나는 신비로운 천지인 경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도표로 표현한 것은 시작과 끝의 각각의 1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전체 상자가 마치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도, 끝도 시작도 없이 우주는 순환한다는 상징이다. 첫 구절은 없는 데서 시작하는 시작(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은 다함도 없는 다함(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으로 끝난다. 일시무시일이 알파라면, 일종무종일은 오메가다. 천지인 만물의 상생과 무궁무진한 우주속에서, 유구한 우리역사의 한 모퉁이 갑진년 세밑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틀인 대립과 투쟁 구조의 서구사회학이 만들어낸 폭력적 군중과 정부의 제도적 폭력도, 한민족 특유의 양심과 윤리적 연대의 태극사상이 녹여버렸다. 속희가무의 민족답게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겨하던 한민족 특유의 역동성과 신바람난 빛과 응원봉으로 총칼과 어둠과 불의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2024년 12월이다. 한민족의 본성인 태양처럼 밝은 마음들이 빛나기 시작하자, 노나메기문화의 전통이 차와 빵 김밥 온기 나눔으로 홍익세상을 꽃 피운다. 어릴적 마을의 경조사 때 온마을 사람들이 울력하여 축제를 벌이던 시절이 겹쳐지는 눈물겨운 환희의 겨울축제 모습이다.

인생사나 국운이나 마음먹기 달렸다. 불행한 비상계엄이었지만 엄청난 동방예의지국의 품성과 자신감을 세계에 드러낸 기회였다. 우리 모두 태양처럼 빛나는 겨레의 밝은 양심을 되찾고, 공공심으로 울력하면서 긍정의 힘으로 국운 상승의 새해를 기도해보면 좋겠다. 부끄러움과 염치를 아는 이들, 진정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는 이들이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홍익인간·도덕국가를 다시 세우는 을사년을 간절히 염원한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