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또는 '비상계엄' 스트레스
백승종의 역사칼럼
올 12월 3일, 윤석열이 내란을 꾀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윤씨는 '과대망상증' 환자로 이번에 그는 국회를 완전히 무력화하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최측근인 김용현, 이상민, 여인형 등은 바로 그처럼 황당무계한 백일몽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특히 여인형은 평소에도 제2의 전두환을 꿈꾸며 시건방을 떨었다. 이상민과 김용현도 그에 못지 않은 야심가로, 감히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을 영웅이 가야할 길처럼 여긴 것이 명백하다.
독재자 '박정희 망상' 공유 집단
윤석열 일당이 제2의 5·18을 획책한 배경에는 독재자 박정희의 망령이 자리한다. 군사반란의 역사는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소급되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친위 쿠데타는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 그 사건은 1972년 10월 17일에 독재자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꿈꾸며 헌법을 위반한 데서 시작되었다. 독재자는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회를 불법적으로 해산하고, 헌법의 기능까지도 마음대로 정지하는 등의 죄악을 서슴치 않았다.
이후 박정희는 계엄령 아래서 개헌을 밀어붙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국가 질서를 재편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10월 26일까지 박정희는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권통치를 이어나갔다. 내가 보기에, 윤석열 일당은 <10월 유신>을 21세기 한국에서 재현(再現)하려는 망상을 공유한 집단이다. 그들의 죄악은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길이 후세에 경종(警鍾)을 울릴 줄 안다.
박정희가 비상계엄령을 발동한 1972년 10월 17일에 나의 선친은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정보부 직원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셨다. 구속의 사유도 알려지지 않았고, 구속영장도 발부되지 않았다. 어디로 끌려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었으며, 과연 살아돌아오실는지도 불투명하였다. 다행히 얼마 후에 선친은 생환하셨으나, 비상계엄이 우리 가족에게 준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깊었다.
방심하면 곤란...저들은 아직도 거의 모든 권력기관 장악한 상태
윤석열 일당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란을 착실히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많은 사람이 지레 짐작하듯 어설프게 시도한 것이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고, 치밀하게 연출한 내란시도였다. 그들의 속셈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윤석열 일당의 저항은 강력하다. 우리가 그들을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완전히 윤씨 일당의 무릎을 꿇릴 때까지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저들은 아직도 거의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란이 주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느끼고 있고, 국가 경제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수괴(首魁) 윤석열에 대한 처벌이 늦어질수록 우리 사회는 끔찍한 부채를 떠안게 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여당(與黨)이 아직도 윤씨의 탄핵에 미온적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은 윤씨와의 연결고리를 청산하는데 엄청난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그들은 시민을 상대로 싸울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시민의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