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지상주의의 딜레마
백승종 칼럼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읽다가, 나는 그가 1687년(숙종 13) 숙종에게 올린 한 장의 흥미로운 상소문을 발견했다.
이 글에서 송시열은 자신과 윤휴 및 윤증의 어긋난 관계를 소상하게 적었다(송시열, 『송자대전』 제19권, 「대의(大義)를 논하면서 윤증의 일을 진달하는 소」). 한 대목을 발췌하여 싣고, 소감을 간단히 적어둔다.
"윤휴는 편파적이었고 언행이 지나쳐 주자를 함부로 헐뜯었습니다. 그는 주자의 주석(註釋)이 옳지 않다며 자신의 글로 바꾸었습니다. 특히 『중용』은 장구(章句)를 다 없애고, 새로 주석을 달아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논설(說)까지 붙여서 감히 자기 자신을 공자에 견주었고, 주자를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에 빗대었습니다. 그가 어그러지고 못됨이 이러했습니다.
하지만 주자의 도(道)는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윤휴 같은 이가 1만 명이 나와서 헐뜯는다 할지언정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햇빛을 흐리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함에도, 그의 소행이 세도(世道)를 해친 바가 컸습니다.
그때 조정 대신들로부터 벼슬 없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바람에 휩쓸리듯 그에게 빠져 들었습니다. 그들은 윤휴가 주자보다 더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윤휴의 글을 돌려가며 베끼고 과장하며 유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이름이 난 사람일수록 중독이 더욱 심했습니다."
송시열은 윤휴가 사약을 마신 지 7년 후, 그리고 자신이 사약을 마시기 2년 전에 이 상소문을 썼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 81세였다.
이 글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일종의 변론문이었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당당했고, 가슴속에는 윤휴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어떤 이는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댄 것은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독창적이고 패기만만한 윤휴가 너무 부러워서였을 거라는 주장이다.
다른 이는 송시열이 남인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주희의 화신처럼 행세했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이는 국왕 숙종이 양측의 학문적 시비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며 넌지시 나무란다. 세 가지 주장에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진 것 같다. 송시열도 숙종도 윤휴도 선비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치투쟁과 경전 해석이 별개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것이 유교적 도덕 지상주의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가치관의 다원성을 인정하기가 불가능한 선비들이었다. 17~18세기 초반, 조선 사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출처: 백승종, <중용, 조선을 움직인 한권의 책>, 사우, 2019: 세종우수교양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