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이 없었다면 역사도 없었다"...국가 유산 가치 1호 '조선왕조실록' 살려낸 '도암 오희길'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58)
세계 최고 최대의 역사기록 유산이 조선왕조실록이다. 국보 호수가 등재순이다 보니 국보151호다. 중요치 않은 국보가 없겠지만 문화유산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필자는 마땅히 국보1호에 놓고 싶다. 임진왜란 난리 속에서 4대 사고중 유일하게 지켜낸 전주사고본 실록을 사수한 책임관이 경기전참봉 오희길이다. 함께한 실록지킴이 의병장 두 분이 유명한 안의와 손홍록인데, 오희길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9월 27일 고창문화원에서 <도암 오희길의 학문과 역사정신>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도암 오희길은 출처와 의리를 분명히 한 조선시대 고창출신의 대표적 선비다. 경기전 참봉으로서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서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살려낸 책임관리였다. 고창향교를 짓도록 지신의 집터를 흔쾌히 희사하고, 순창의 누이집으로 떠났던 의인이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 때 정여립 문인이라서 투옥되었다가, 정여립과 절교 선언한 편지 한 장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덤으로 벼슬까지 얻어, 경기전 참봉, 태인 현감을 지냈으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귀양가서 죽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태조어진과 실록을 구해낸 그의 뚜렷한 업적과 우리나라 유학의 도통을 밝혀낸 <도동연원록>의 저술 등 학문적 성과 등이 그간 어둠에 묻혀있어서 안타까웠는데,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되어 퍽 다행이다.
오희길(吳希吉 1556~1625)은 나주오씨로 호는 도암(韜庵), 부친은 공주판관을 지낸 오언기(吳彦麒)로, 현재 고창향교 터인 고창읍 교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살 무렵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하였고, 16세에 인근 장성의 학자집안인 행주기씨 기효관(奇孝寬)의 딸과 혼인하였다. 절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21세에 처당숙이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인 기효간(奇孝諫)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고창유학 호암 변성온(卞成溫), 장성유학 하곡 정운룡(鄭雲龍) 등과 교유하였다.
편지 한 장으로 목숨과 벼슬을 얻은 '도암'
그는 정여립(鄭汝立) 문하에도 출입하였는데, 정여립이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을 비난하는 것을 보고는, 여립을 비판하는 장문의 절교편지를 보냈다. 1589년 호남인재들의 씨를 말렸다는 기축옥사, 이른바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구금되었으나, 그가 보낸 절교 편지를 본 선조가 의인이라며 오희길을 석방하고, 도리어 포상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했다.
임진왜란 직전해인 1591년 전주의 경기전참봉으로 전근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들이 불타버리자, 경기전의 태조어진과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등을 정읍 내장산 동굴로 피난시켜 살려냈다. 실록의 운반과정과 1년여의 내장산 수호기간 동안 태인선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1593년 7월 조정의 명령으로 관원에게 인계되어, 충남 아산, 해주, 강화도, 안주, 묘향산 등으로 옮겨 적군을 피해다니다가, 마침내 1614년(광해 6) 11월 태조의 어진을 전주 경기전에 봉환할 수 있었다.
실록은 1603년에 서울로 옮겨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3부를 찍어서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험한 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게 된다. 경기전 어진 봉환제사를 모실 때, 조정에서는 오희길의 그간의 공적을 감안하여 수헌관으로 임명했다. 1615년 정월 태인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당쟁에 휩쓸려 6월에 무고로 파면된다. 1618년(광해 10) 7월 위성원종공신일등(衛聖原從功臣一等)이 되었으나, 다음해 8월 허균의 무고로 거제도에 귀양을 갔다. 1620년(광해 12) 유배지에서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을 지었고, 유배지에서 향년 70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자기 집을 '향교터'로 희사하다
도암은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24세 때인 1579년 그의 집터가 성산 문필봉 아래 명당이라서, 향교 신축부지로 좋은 자리라는 고창유림의 공론에 따라 비싼 값을 처줄테니 팔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당초의 고창향교는 현재 월곡리 제일아파트 터인 천북면 학당골에 있었는데 저습지로 부적합하여 이전 신축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도암은 공자님 덕분에 내가 사람노릇 하고 사는데 어찌 집터를 비싼 값에 팔겠냐면서 흔쾌히 신축 향교부지로 희사했다. 정작 자신은 유일한 재산인 사는 집을 내놓고 고향을 떠나, 현재 순창군 금과면 고례촌으로 이사하여 누이댁 더부살이 신세가 되었다. 순창의 양택 3대길지라는 고례촌은, 고승이 예불을 드리는 모양의 길지라서 고승예불형, 약칭 고례촌인데 큰누이가 남원양씨 양시척에게 시집가서 거기에 살고 있었다. 도암의 묘소가 순창 고래촌에 있게된 연유다.
새마을사업 무렵까지만 해도 학교건립이나 지역 공공사업에 부지를 희사하는 일들이 흔했다. 지금은 기부한 토지의 미등기 도로부지마저 되찾으려는 기부자 후손들의 소송이 줄을 잇는다.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빈부격차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가진자와 배운자들의 갑질횡포, 내자식 제일주의가 판을 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공동선도 없고 가진자의 책무나 염치도 실종된 부끄러운 우리사회에, 사는 집마저 공동체에 희사한 도암같은 조선 선비가 더욱 그립다.
배운자의 책무, 가진자의 책무를 온전히 다한 고창 선비 오희길을 모신 사우가 아산면 마명마을에 있는 금암사(琴巖祠)다. 왜 가야금 금자 금암을 사우명으로 썼을까? 금암사 뒷산이 바로 옥녀가 가야금을 타는 모양, 옥녀탄금형의 가야금 바위 곧 금암인 까닭이다. 고창출신 국창 김소희도 이곳 옥녀탄금혈에서, 방년 18세에 득음을 하고 국창이 된 명당이다. 도암의 후손인 나주오씨 마명종친회에서 마명마을 주변의 길지에 터를 잡았고, 사우이름을 정하는 데에서도 옛사람들의 빼어난 인문학적 내공을 엿볼 수 있다. 도암의 아름다운 향기가 가야금 곡조처럼 후학들의 귓전에 은은히 울리기를 바랐으리라.
자랑스런 전북인의 역사인 전주사고 실록 수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기초를 놓은 전북선현 역사지킴이 의병 영웅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벼슬을 바라고 공치사를 위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몸을 상해가면서 그 어려운 일을 해냈겠는가? 배운대로 옳은 일을 위해 신념을 실천한 지행합일의 선비, 배운자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
함께 써야할 역사, 상생의 역사문화 '울력'
배운자, 가진자의 책무를 실천한 선비들과 의병, 의사가 있었기에, 조선은 세계최장의 5백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서양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보다, 조선 선비들의 의리헌신이 더욱 빛나는 사례가 무수히 많다. 세계사 어디에 위기때마다 의병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하는 역사가 있던가? 절대권력인 왕도 볼 수 없도록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사관과 실록편찬 시스템이 어디에 또 있었던가? 전북의 역사지킴이 의병사를 오늘의 문화유산지키기 국민울력운동으로 승화하면 좋겠다.
각각의 씨족 종친회는 자기 조상들의 공적만 두드러지게 기록하려 미화해온 경향이 많다. 지방정부는 자기지역 역사만 빛내고자, 타지역 기사는 폄훼하는 경향이 짙다. 적당히 미화하고 분칠해도 모르고 지나가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접근이 어렵던 왠만한 한문원전들이 속속 번역되고 디지털화되어, 역사 문헌정보의 검색이 쉬워지고 있다. 내 조상, 내 지역만 미화하려고 사실을 왜곡한 기록들은 금방 들통나고마는, 역사기록 검증이 용이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 다른 집안과 이웃 시군과도 상생하고 서로가 빛내주는 역사기술과 활용이 절실하다.
경기전, 전주사고와 실록을 지켜낸 전북 선비들 이야기는, 정읍에서 일찍부터 선양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아쉬운 건 정읍 선비 안의와 손홍록 이야기 뿐이고, 책임관이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의 역할은 한 줄도 없다. 도암이 정읍출신이라면 어땠을까? 태인현감도 지낸 오희길이니 정읍의 역사 속에 한줄쯤 기록할 명분도 있었다. 여러 시군이 따로 따로 추진하고 있는 관련 문화사업을 연대하고 울력하여 함께 추진하면 효과가 크게 증폭되리라 본다.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었다...'若無全北 是無歷史'
전주시는 경기전 어진봉안행차, 정읍시는 전주사고 실록 이운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고창군은 금암사에서 향사하는 일과 고창읍성 한옥마을에 도암당이란 당호를 붙인 이외의 문화행사는 아직 없다. 필자가 전주시 문화국장 재임시절, 김완주 시장 1호공약인 "경기전 시민개방"을 실행하기 위해 태조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모시면서, 풍남제 행사의 하나로 태조어진 봉안행차를 기획시행하기 시작했었다. 그때는 필자의 역사공부가 부족하여 오희길, 안의, 손홍록의 눈물겨운 실록사수 이야기의 진면목을 잘 몰랐었다.
오늘날 역사적 가치나 의미로 되새겨 보자면, 전주, 정읍, 고창, 순창 등 관련 시군들과 실록사수 영웅들의 후손들과 함께 손잡고 연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양한 교육체험, 문화행사와 예술작품을 기획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전북도와 관련시군들이 손잡고 "조선왕조 실록 피난길 걷기 체험" 등 다양한 활용사업으로 공동기획을 시도해보면 참 좋겠다.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었다(若無全北 是無歷史). 전북인이 없었으면 역사도 없었다. 얼마나 자랑스런 전북사람 이야기인데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역사인가?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