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 나라에 반성할 줄 모르는 '혼군(昏君)'이 있으니...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4-10-06     백승종 객원논설위원

김종직의 〈조의제문〉...사화로 이어진 명문

백승종 역사학자

“정축년 10월 어느 날 나(김종직)는 밀양을 떠나서 경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답계역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어떤 신(神)이 나타났다. 그는 칠장(七章)의 (화려한) 의복을 입었고 헌칠하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이다.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郴江에 가라앉았다.'

이 말이 끝나자 신은 문득 사라져버렸다. 놀라서 꿈이 깨고 말았는데 혼자서 생각해보았다. 

‘회왕은 남초(南楚)의 인물이요, 나는 조선(東夷) 사람이라 서로 거리가 만여 리나 된다. 그뿐 아니라 세대로 보아도 앞뒤 거리가 천 년도 휠씬 넘는다. 그런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다니, 이것이 무슨 조짐일까?’

그때 역사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회왕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는 기록은 없다. 정녕 항우가 부하를 시켜 왕을 몰래 죽이고는 그 시신을 강물에 던진 것이런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연산군일기》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찾아본 것인데, 작중인물 회왕은 훗날 의제(義帝)라 불린 비극의 주인공이요, 김종직은 그의 넋을 위로하려고 이 글을 지었다. 꿈속에서 김종직은 초나라의 의제를 만났다고 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김종직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엾은 의제를 위해 제문을 지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일은 황당하기도 하고, 무엇인가 풍자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만고의 역적'이라고 비판한 이유는? 

이 한 장의 글을 구실로 삼아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가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미 고인이 된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 시신의 목을 벰)하였다. 김일손을 비롯해 조정에 남아 있던 김종직의 제자들도 모두 벌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당시에 조정 대신 이극돈과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멋대로 해석하였는데, 거기에 연산군이 맞장구를 쳤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비겁한 신하들은 할 말을 잊은 채 왕과 이극돈 등의 견강부회를 따랐다.

그들이 문제 삼은 구절을 설명하지 않으면, 21세기의 독자들은 도무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사족(蛇足)을 붙인다. 첫째,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김종직이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유했다며 비판하였다. 김종직은 제문에서 “조룡이 아각을 희롱”했다고 읊었는데, 조룡은 진시황의 별칭으로 통하였다. 하지만 진시황과 세조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김종직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었다.

둘째, 사화의 주모자들은 김종직이 의제를 단종과 동일시했다고 보았다. 그 역시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이었으나, 대신들은 행여 집권층의 뜻을 거슬러 불이익을 당할까 봐 일제히 침묵하였다. 셋째, 세조가 김종서를 제거한 사건이 제문에 나온다는 해석도 있었다. 제문에 등장하는 구절, 즉 “양흔낭탐이 관군을 마음대로 살해함이여!”라는 구절을 가리켜, 양흔낭탐은 세조요, 관군은 충신 김종서에 해당한다는 식이었다. 이 역시 해석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넷째, 김종직의 <조의제문>에는 충신이 세조를 적당한 때 제거하지 못했다고 한탄한 구절이 보인다고 하였다. “어찌 (그때) 체포하여 제부에 기름칠을 아니 하셨습니까”라는 구절이었는데, 역시 억측에 불과하였다. 다섯째, 단종이 세조를 제때 제거하지 못한 결과 도리어 세조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뜻이 담긴 글귀도 있다고 하였다. “반서를 당하여 해석이 되시다니”라는 구절이었다. 그것은 의제가 정적을 제거하지 못한 사실을 한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극돈 등은 해당 구절이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말한 것으로 보았다.

끝으로 “자양의 노필을 따르려니,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옵니다”라는 구절도 문제 삼았다. 김종직은 주희(자양)의 관점에서 이 제문을 지었으무로, 세조를 도덕적으로 단죄하였다고 풀이했다. 김종직은 세조의 반역자란 뜻이었다. 도대체 이처럼 무리한 해석이 어떻게 성립할까? 의아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조의제문〉이 《세조실록》에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스승의 <조의제문>을 실록에 싣고는 한마디 짤막한 평가를 붙였다. 

사사건건 이치 따져 왕의 잘못 비판하는 사림파 싫어한 '연산군' 

“(김종직은) 이 글을 통하여 충분(忠憤)을 표현했다.”

이 한 구절이야말로 이극돈과 유자광 등이 <조의제문>을 불충한 문장이라고 단정하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이극돈 등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연산군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불충한 글이라고 결론지었다. 연산군은 분노를 터뜨리며 김종직을 심하게 나무랐다. ‘한미하고 천한 선비에 불과한 김종직이 성종의 총애로 형조판서에 기용되기까지 하였건마는, 분수를 어기고 이따위 글을 지어 감히 이씨 왕조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였다’라는 식이었다. 

연산군은 김종직과 김일손 등이 감히 세조를 헐뜯고 비웃었다며, 3품 이상의 조정 관리들에게 김종직을 성토하는 글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수십 명의 관리가 입을 모아 김종직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강력한 처벌을 시행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조관(朝官) 중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모두 들고 일어나 김종직과 김일손 등을 만고의 역적이라고 비판했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과 이극돈은 저마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 김종직과 사적 원한이 있었다. 우선 유자광으로 말하면, 부윤(府尹, 종2품) 벼슬을 지낸 유규의 서자였다. 일찍이 유자광은 경상도 함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경치를 감상하고 나서 한 편의 시를 지어 정자에 걸었다. 그런데 나중에 김종직이 이 고을의 원님이 되자 유자광의 글을 혹평하고 없애버렸다. 그 소문을 들은 유자광은 가슴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그럼 이극돈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그는 훈구파의 거두로서 조정의 실세였는데 공적인 일로 김일손이 그를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 앙금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마침 이극돈이 《성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게 되었다. 편찬관으로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의 매 같은 눈에 〈조의제문〉이 들어왔다. 이에 이극돈은 자신의 수족인 유자광과 공모하여 사림파에게 타격을 줄 궁리를 하였다. 

우리를 실은 배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연산군은 그러지 않아도 사사건건 이치를 따져 왕의 잘못을 비판하는 사림파가 싫었다. 연산군이 보기에, 이극돈과 유자광을 앞세워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탄압한다면 세상이 조용해질 것이고, 앞으로 나랏일이 슬슬 잘 풀릴 것 같았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왕과 도리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신하 두어 명 그리고 권세를 좇느라 의리도 명분도 잃어버린 비겁자들이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이 나라에는 반성할 줄 모르는 혼군(昏君)이 있다. 또,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정적이라면 수백 번씩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해서라도 기를 꺾으려는 무리가 엄존한다. 여기에 돈과 자리에 연연하며 할 말을 꺼내지 못하는 바보 같은 고위층과 욕심으로 가득한 지식인과 종교인이 수천 수만을 헤아린다. 우리를 실은 이 배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