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왜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야 했을까

인물탐구 : 다산 정약용

2020-04-21     이강록 기자
다산 정약용

“하늘이 불인정한다면, 경서의 주석,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참된 공부

―“나는야 조선 사람,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려면 다산의 가르침 새겨야

평생을 육경과 사서로 수신하며 ‘일표이서’를 완성해 천하의 지침을 마련하려 했던 대학자가 누구인가.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다산은 늘 시대의 아우성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유배와 좌천은 역경도 아니었고, 터무니없는 모함과 치졸한 질시 따위는 그를 깎아내리지 못했다. 일생동안 다산의 학문과 관직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 네 글자였다. 그 정신만큼은 유배 기간에도 변함없었다.

올해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지 이백 년, 오랜 유배에서 해배된 지 이백 년이 되는 해였다. 그 이백 년이 지난 오늘의 세상은 어떤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를 어디서 찾을 수 있기나 하는가. 정치권, 재계, 금융계, 문화계 심지어 법조계,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풍토와 몹쓸 폐단이 나돌지 않은 곳이 과연 어느 분야에 있는가.

때문에 우리는 이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사의 스승으로부터 지혜와 가르침을 터득해야한다. 헌데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다산의 말(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금과옥조라 한들 서고의 책과 역사 속에 파묻혀 있다면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다산의 일표이서는 가르침이 크다. 국가의 행정제도를 비롯해 문물제도를 통째로 바꾸고 고치자는 「경세유표」에서 오늘의 제도개혁과 지방분권의 논리를 찾아야 하고, 상하 모든 관리들이 청렴한 공직자윤리를 회복하고 애민과 봉공(奉公)해야 한다는 「목민심서」에서 부패와 타락을 막을 논리를 찾아야 한다. 또 「흠흠신서」에서 억울함이 없게 만드는 진정한 법철학과 인명(人命)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편집자>

평생의 언행 내가 기록해 내 묘지문으로 삼는다

다산 정약용의 묘

아무리 인간과 학문이 걸출했던 다산도 유배에서 풀려나고는 자신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했다. 그리고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필생의 파란과 곡절, 영광과 오욕을 조용히 정돈했다. 살아서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묘지명을 통해서였다. 그것도 회갑이 되는 해에 썼다. 바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내 일생의 기록은 내가 챙겨야지. 내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해서 내 무덤의 묘지문(墓誌文)으로 삼는다. 정말 나 같은 죄인의 글을 누가 새겨줄 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묘지(墓誌)에 새길 글자는 이렇게 남기고 싶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보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을 쓴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산은 왜 스스로 묘지명을 썼을까? 무덤 속으로 안고 들어갈 자신의 일생을 자처해서 쓴 것은 무슨 심사였을까? 기나긴 유배의 서러움과 고초 속에서 한없는 못 다한 말과 억하심정을 풀어내려고? 일생을 박람강기와 실사구시로 외길을 걸었던 자신을 알리고 싶어서? 아니다. 후세에 경책(警策)으로 남겨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였을 게다. 우리는 이 뜻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세상을 함께 굽어보고 살펴본 위대한 실천가이자 경세가 다산의 묘지명은 참 많은 생각을 곱씹게 만든다. 유배에서 풀려나 회갑년이 되던 해 다산은 자신의 인생 60년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죄인이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뉘우침으로 점철되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자기가 신뢰받았던 정조(正祖)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유배의 세월이었건만… 이 기나긴 유배가 끝났는데 다산은 왜 뉘우침을 먼저 꼽았을까? 다산이 뉘우친 ‘죄’라면 어떤 죄였을까? 자신의 신념과 학문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은 죄? 학문과 실용에 남다른 예지력을 가진 임금을 최측근에서 보좌해 사랑을 독차지하고 출세가도를 달린 죄? 아니면 시대가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때를 잘못 만난 죄?

무슨 죄일지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안다. 다산의 속 깊은 마음과 뭇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백성들의 곤궁함과 아픔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했고 그 해결을 위한 통찰과 성찰에 누구보다 마음 씀이 깊었던 다산! 그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부지런히 땀흘려도 죄 없이 착하기만 해서 날로 궁핍해져 가는 많은 국민들은 물론 세상 경영에 한 몫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경영하고(經世) 국민을 구제하기(濟民)가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하여 몸소 실천하고 고초를 감내한 위대한 선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인심이 강퍅해지고 세상살이가 피폐해져 간다. 이즈음 정다산 선생의 속뜻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은 왜인가? 그만큼 시절이 어렵고 곤궁할 때에는 현인과 달사에 대한 간절함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눈빛이 맑고 선했으며 가슴 따뜻한 어른이자 스승이었던 다산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 편 글로 묶였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허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

허나, 누구도 이끌어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몸으로 증명하여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랴만,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들어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자찬묘지명’ 마지막 부분이다. 스스로 경계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위대한 성취 뒤에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집념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은 18세기의 대표적인 실천지식인이다. 경학자이자 예학자, 목민관이면서 교육자이자 사학자, 그리고 기계토목공학자, 지리학자, 의학자였다. 그 위대한 다산의 성과 뒤에는 ‘천재성’이 아니라 ‘과골삼천(踝骨三穿)’이 있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정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40세 때부터 기나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57세에 본가로 돌아오기까지 20년 가까이를 힘든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좌절은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귀양지에서 책상다리로 18년을 앉아 책을 읽고 쓰다가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뚫렸다. 그렇게 노력을 했고, 귀양이 풀려 고향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자신이 정리한 232권의 경집(經集)과 260여 권의 문집을 들고 왔다.

다산은 1818년 9월14일 해배되기 직전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유배지 다산을 떠났다. 기나긴 18년의 유배살이를 마치고 쉰일곱의 나이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인 1819년 다산은 「흠흠신서」 30권을 끝내며 자신이 호칭했던 대로 ‘일표이서’라는 경세학의 대저서들을 이룩했다.

“나는 일생동안 육경과 사서로 나의 몸을 닦아왔다. 그리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렇게 일표와 이서를 지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육경사서와 일표이서로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내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다. 나의 이런 견해를 하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저 훨훨 타고 있는 하나의 횃불로 육경과 사서의 주석들, 그리고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도 좋다.” (‘자찬묘지명’)

다산이 수많은 책을 쓴 이유는 위의 말 속에 담겨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어’ 학문의 뜻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어’ 하늘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랐다. 다양한 학문체계를 통합· 발전시키고 싶었던 학자로서의 꿈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신하로서의 꿈, 유배 전에 못다 이룬 꿈을 그는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가꾸고 돌봤다.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한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1836년) 올해로 세 갑자(18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다산은 회갑을 맞아 파란곡절의 삶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리해 남겼다.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살펴보면 좀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통상 문집에서는 그 문집 주인공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 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산의 경우에는 그 묘지명을 자기 자신이 써 ‘자찬묘지명’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라. 이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고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정리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다산이 그렇게 자신이 썼다는 점을 밝힌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묘지명이란 본시 죽은 자를 위해 다른 사람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자신이 썼다고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다산 초당

과거는 마치 어제와 같은데, 다산이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육십이다. 환갑을 맞았지만 정녕 자신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 기념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좌상 앞에 앉았다. 환갑을 맞아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무덤 속에 가지고 갈, 스스로 쓰는 삶의 기록을 써나갔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다산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그는 그 기록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삶을 칭송하여 적은 글이다. 그래서 통상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써주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다산은 회갑 때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이다. 왜 스스로 지었을까? 60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여생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또 자신의 삶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왈가왈부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을 터이다. 재앙을 당한 자신의 삶이 잘못 알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다산이 묘지명을 스스로 쓰겠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남들이 쓰는 묘지명의 한계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 예찬이 앞서다 보니 거짓된 내용으로 꾸며지는 극단적 폐단까지 낳았기 때문이다. 이름과 가계 등 내용 일부만 바꾸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비슷비슷한 묘지명은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듯 생명력 없는 뜻이 담긴 죽은 글을 무엇하러 남긴다는 말인가. 이런 무의미하고 상투적인 허례를 다산이 용인할 리 없다. 때문에 아예 자기 자신이 묘지명을 쓰고자 했다. 남들의 허황된 찬사나 공연한 추임새를 다산의 자의식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반듯하고 또렷하게 기록하려는 냉철함이 자찬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내가 역사에 무슨 큰일을 남겼다고 남에게 묘지명을 받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이기도 했고 자신이 영위한 삶과 행적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찬묘지명을 썼던 다산이 다른 선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그의 처지 때문이다. 환갑에 이르러서야 유배지에서 돌아왔건만 다산을 다독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묘지명을 기대하는 것마저도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 사방이 두려운 듯 신중해야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은 찾아온다. 대개는 그 무게와 엄중함에 짓눌려서 적당히 외면하거나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만 다산은 그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 반생 가까이 흘려보낸 삶이 억울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그런데도 방대한 저술활동을 집요하게 소개하며 그 이후에도 꾸역꾸역 살아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그렇게 신산스런 길을 지나왔음에도,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원망도 냉소도 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자찬묘지명’은 글의 성격이 묘하다. 자서전도, 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한 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자 할 때 곧잘 죽음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럼에도 ‘자찬묘지명’ 하면 마치 정약용의 글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다. 이런 연유는 다산의 개인사가 곧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관통하기 때문이고, 다산만의 자찬묘지명 자체가 가진 독특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듯 써내려간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또 묘비명, 곧 무덤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비면에서조차 끝내 삼켜야 했던 말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들 사이에서 맴도는 번민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다산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스스로 털어놓는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를 못 한다.” 이어 자신을 책하기도 한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일찍이 방외(方外)에 몰두하며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고, 이미 장년이 되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서른이 넘어서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가 깊이 벌려졌지만 두려워하지를 않았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종내에는 “내 약점을 경계하고자 이 집을 ‘여유당’이라 이름 짓는다”고 기록을 남겼다.(‘與猶堂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지은 당호(堂號)가 여유당이다. 이 호에서 다산의 마음가짐과 처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지은 이 호는 《도덕경》 구절에서 따왔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與兮, 若冬涉川) , 유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猶兮, 若畏四隣)’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테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은 이렇듯 세상과 일을 대하는데 신중했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라”

‘학연에게 부침(寄淵兒)’이라는 편지에서 다산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詩)가 아니다.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찬미하고 풍자하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며 “뜻이 서지 않고 배움이 순수하지 않으면 큰 도를 듣지 못하여, 임금에게 미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마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능히 시를 지을 수가 없다. 너는 힘쓰도록 해라”라고 아들 학연에게 권하고 있다. 이 글에서 보듯 다산의 삶과 학문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는 핵심가치의 첫 번째는 바로 ‘위국애민(爲國愛民)’이다.

다산은 더불어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또 무엇에 보탬이 되는가를 스스로 물었다. 이 물음에 들어맞는 대답이 없으면 다산은 어떤 작업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 동안에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음풍농월이나 하며 자기과시에 여념 없는 시를 그는 철저히 배격했다. 시문이 아름다운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뜻과 지혜가 중요했다. 알맹이 없는 내용이나 세상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문학은 단지 쓸모없는 재주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두 아들에게 보임(示兩兒)’이라는 글에도 다산의 이런 뜻이 나타난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와 군신 및 부부의 윤리에 달려있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힘없는 사람을 건지고 재물 없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방황하고 구슬퍼하며, 차마 이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못하는 뜻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시랄 수 있다. 만약 단지 자신의 이해에만 관계된다면 이것은 시랄 것도 없다.”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라고 다산은 말했다. 이런 마음이 없이는 학문도 문학도 아무 의미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메말라 가는데 제 몸만 아끼고 제 식구만 챙기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책 쓰느라 세 번이나 구멍이 난 복사뼈(踝骨三穿)

다산은 공부의 방법으로 ‘초서(鈔書)’를 가르쳤다. 책의 중요 대목을 베껴 써가며 읽는 방식이다.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초서를 계속 했다. 사람들이 “그 나이에 초서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났습니다. 제게 삼근(三勤:마음을 다잡아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것을 얻었다.’ 몸으로 가르쳐주시고 직접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른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고사다. 자찬묘지명은 후반부에 다산이 힘들여 지은 저서를 소개하는데 상당 분량을 할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그 저서들을 한 덩이 불로 태워 버려도 좋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자부심이 결코 작지 않았다.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극진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자신의 저서를 잘 읽어주는 것을 바란다고 했을 정도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는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했다. ‘사(俟)’는 ‘기다릴 사’다. <중용> 29장에 ‘百世以俟聖人而不惑(백세이사성인이불혹)’이라는 구절이 있다. “먼 훗날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호를 ‘사암’이라고 한 뜻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중용>에서 쓰인 것처럼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다음으로 문자 그대로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대에는 더 이상 뜻을 펼 수 없는 처지에 있으니 훗날 자신의 뜻을 알아줄 성인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두 가지 뜻을 다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이상의 해석은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의 풀이다.

다산연구소는 더불어 “정약용은 당대에 뜻을 펴기 어려웠지만, 그의 많은 글은 지금까지 전해져 후대가 그의 뜻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필요한 일부만 읽는 느낌이 없지 않다”며 “그는 여전히 후대가 제대로 읽어야 할 대학자요, 개혁사상가”라고 견해를 밝혔다.

우리 것을 중시하는 꼿꼿한 줏대와 정신

다산은 ‘나는야 누군가, 조선 사람(我是朝鮮人)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甘作朝鮮詩)’라며 ‘그대는 그대의 법을 씀이 옳으니(卿當卿用法) 어리석다 떠들어대는 자 누구인가(迂哉議者誰)’라고 시로 읊었다. 조선 사람으로서의 꼿꼿한 줏대를 세웠다. 바로 일흔세 살 때 지은 시 ‘노인의 한 가지 통쾌한 일(快事)’에서였다.

조선 사람이 조선 시를 쓴다는데 뭐가 잘못됐는가. 우리의 고사나 지명, 방언조차도 시 속에다 자유로이 활용해가면서 조선 사람의 정서가 녹아든 조선색깔의 한시를 능란하게 창작했다. ‘장기농가’ ‘탐진촌요’ ‘탐진농가’ 같은 연작시에는 그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그들이 쓰는 언어가 그대로 녹아있다. 이것이 다산이 말한 조선 시정신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학연에게 부침(寄淵兒)’이라는 편지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고사와 인물 전거를 폭 넓게 활용해야 중국에서도 경쟁력을 가진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곤 한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및 그밖의 우리나라 글에서 사실을 채록하고,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넣어 쓴 뒤라야 바야흐로 세상에 이름나고 후세에 전할 수가 있다. 유득공의 ‘십육국 회고시’를 중국사람들이 판각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징험할 수가 있다.”

우리 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입으로만 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삶의 기호는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다산은 아무리 훌륭한 학식을 지녔어도 제 것을 모르면 쳐줄 것이 없다고 나무랐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마흔 살이던 1801년 11월 23일 추운 겨울이었다. 대역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하니, 인심도 겨울이었다. 이때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 주모였다. ‘매반가(賣飯家)’는 밥 파는 집이다. 주모는 골방 한칸을 내줘 다산은 그곳에서 기거했다. 동문매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때가 정약용에게 가장 어려운 때였다. 아직 몸도 마음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던 때였다. 이후 서서히 도움의 손길도 나타나고 다산은 기력을 회복했다. 다산은 1803년 동짓날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썼다. 자신의 거처 동문매반가의 누추한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의(四宜)란 ’네 가지 마땅함‘이란 말로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뜻은 아마도 다산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무하기 위한 다짐이었지 싶다.

‘사의재기’는 끝부분을 이렇게 맺었다. “겨울 12월 신축일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乾卦)를 읽었다.” ‘건괘를 읽었다’함은 스스로 부지런함을 다짐하는 의미다. 이처럼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의지를 다졌기에, 다산은 긴 유배기간을 빛나는 저작 등으로 지탱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다산학’이라고 지칭되는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유학자다. 성호 이익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실학자다. 수원 화성 축조에 참여한 공학자였고, 정조에게 상방검을 받은 암행어사이기도 했다. 그토록 뛰어난 재주와 능력, 드넓은 학식과 깊은 사상을 지녔던 다산은 얼마나 억울한 삶을 보냈고 얼마나 기막힌 세월을 살았던가. 그는 18년을 억울하게 유배살이를 한 다음에야 세상으로 돌아왔다. 갇혀 지낸 생을 꼽아보니 삶의 3분의 1이나 차지했다.(해배 당시 57세) 그래도 다산은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먼먼 바닷가 낯선 땅에서 그곳의 백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줬다. 또 그들이 당하는 질곡의 삶을 해방시키키 위해 한없는 애정으로 지혜를 짜냈다. 그런 다산의 대승적인 실천정신을 배워야 한다. 요컨대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기>

이 기사는 목민심서 저술· 다산 해배 200주년 행사 자료집 ‘강진에서 한강까지, 다산과 함께 길을 걷다’(다산연구소 편)를 바탕으로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 정약용의 고해(신창호)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사람과 언론> 제3호(2018 겨울).

/이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