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재촉하는 ‘처염상정’의 연꽃..."아아 님은 갔습니다"
진흙 속에서도 티 없이 피어난다는 꽃이라고 해서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꽃’으로 불리는 연꽃들이 가장 혹독한 올 여름 폭염을 견뎌내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전주시 도심 허파 역할을 하는 건지산 속 저수지인 '오송제'에 해마다 늦여름에 화사하게 피어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홍련(紅蓮)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최장 폭염과 맞서 싸우느라 그런지 연잎과 꽃들이 다소 지쳐보인다.
전주를 비롯한 전북 전 시·군지역이 지난 7월 28일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가 8월 30일까지 34일째 계속 발효될 정도로 무더위와 열대야가 극심했다. 올 여름은 살인적 폭염으로 마치 대한민국 전체가 찜질방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잎과 연꽃들은 언제나 청정한 자태를 유지한다. 깊고 더러운 곳일수록 그 연잎 사이에서 피어난 꽃은 더욱 함박스럽고 청순하고 평화스럽다.
특히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연잎과 그 위에 살며시 고개를 내민 화사한 연꽃을 마주하면 역대급 폭염과 사상 최장 열대야로 맹위를 떨치는 여름 날씨도 금세 잊혀진다. 청초한 연잎 바람과 은은한 연꽃 향기가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해준다. 최악의 무더운 여름 끝이 보이질 않는다고 하지만 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가을이 오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누군가 봄은 향기로 오고 가을은 소리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멀리서 가을 전령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서서히 들려온다. 우렁찼던 매미 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한낮 뜨겁게 내리쬐며 이글거리던 햇빛도 강도가 점점 약해지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멀리서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계절은 이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일러주는 증좌들이다. 제아무리 힘센 폭염도, 열대야도 이제 선선한 가을 바람 앞에 기진맥진할 차례다. 처염상정의 연꽃들이 하나둘 질 무렵이면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고 계절은 성큼 겨울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연꽃을 바라보니 만해(萬海)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이 문득 떠오른다.
'일제강점기 때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로서 일제에 항거하며 그들의 회유와 강압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과 정조를 지킨 독립투사'로 교과서에 기록된 만해 한용운 선생.
선생이 쓴 불멸의 시 ‘님의 침묵’을 암송하노라면 청초한 연꽃만큼이나 마음과 정신을 더욱 맑게 해준다. 친일사관에 물든 저열한 역사 인식이 판치고, 독립운동을 폄훼하며 건국절을 들먹이는 이들이 보수를 참칭하고 있는 이 시대에 만해 선생의 시는 울림이 더욱 크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난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에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김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