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순직 1주기...'풀리지 않은 의혹'과 '깜짝 이벤트'
토요 시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인 1987년 1월 16일,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생 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해 당시 치안본부장이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결국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했다. 바로 1987년 6월에 벌어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른바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사건’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허위 조사 결과 발표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해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식’과 함께 도심 시위가 열리고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던 사인이 들통난 이 사건은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자정 무렵,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돼 고문을 받다 치사한 고 박종철 열사는 잔혹한 폭행과 전기 고문, 물 고문 등을 당하다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사망 원인을 발표하기에 이르게 된 이 사건은 우리 민주역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채 상병 순직 1주기, 풀리지 않은 의혹들...멀기만 한 진상규명
서론이 길어졌다. 각설하고 그로부터 37년의 긴 세월이 흐른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군에 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입대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다 실종돼 14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지 1주기를 맞아 애도의 물결과 은폐 의혹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다. 해병대 1사단 소속이었던 고 채 상병은 남원 출신으로 원광대 재학 중인 지난해 휴학과 함께 해병대에 입대한 지 4개월도 채 안 된 7월 19일 경북 예천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던 중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그 죽음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알 수 없다. 오히려 수사 외압 의혹에 구명 로비 의혹까지 의혹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 1년간 공수처의 수사가 이어졌고 채 해병의 죽음으로부터 1년이 된 최근 국회에서 관련 청문회도 두 번째로 열렸지만 유가족과 많은 국민이 원하는 진상규명은 아직 멀어 보인다. 고 채 상병 순직 1주기를 맞아 서울 및 전국 주요 도심과 그의 고향인 남원에서도 시민사회단체와 야당 정치인들이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지만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해병대원 특검을 고민도 하지 않고, 고민하는 척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다는 비판과 분노가 거세게 일고 있지만 국민과 야당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 채 해병 순직 사건의 주요 변곡점마다 윤 대통령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전화 통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통신 기록 공개로 알려지면서 더욱 채 상병 사망 원인 수사 외압 의혹과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은 커져만 가고 있다.
전북 예산 대폭 삭감 후 대통령 민생토론회…”알맹이 없는 가짜 민생 토론회” 비판
이런 분위기는 고 채 상병 출신 지역에서 더욱 고조되고 있음을 누구보다 대통령실과 대통령 본인이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채 상병 순직 1주년을 맞아 전북지역 민심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가뜩이나 지난해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실패 이후 그 책임을 놓고 정부와 전북자치도, 여야 정치권이 책임 공방을 벌이다 결국 전북 예산 대폭 삭감이란 후폭풍을 맞은 지역이란 것도 윤 대통령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일까. 한달 만에 재개한 대통령의 민생토론회 장소가 전북으로 지목됐다. '깜짝 이벤트'란 말이 나올 만도 했다. 18일 정읍 소재 JB그룹 아우름캠퍼스에서 27번째 윤 대통령의 민생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주제는 '신 서해안 시대를 여는 경제 전진기지 전북'이었지만 알맹이 없는 민생토론회였다는 지적이 당일과 다음 날 지역 언론들에 의해 잇따라 제기됐다. 이날 토론회에선 전북의 기존 사업들만 재탕식으로 열거됐을 뿐 ‘대도시권 광역교통 관리에 관한 특별법(대광법)’ 개정과 '남원 공공의대 설립' 등 정작 중요한 지역 숙원 사업들에 대한 질문에 대통령은 답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생토론회가 ‘민생 없는 가짜 토론회’란 지적과 함께 ‘앙꼬(팥소) 없는 찐빵’이란 비난이 높게 일자 민생토론회가 종료된 후 진행된 사후 브리핑에서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은 "해당 의제가 서로 부처 간에 협의되지 않았던 전북지사의 질문이어서 대통령이 즉답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 도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마침 이춘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익산갑)이 "윤석열 정부의 전북 홀대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며 국회에서 책상을 내려치며 정면 비판하고 나선 것과 윤 대통령 민생토론회가 열린 시점이 비슷하다.
이춘석 의원, 탁자 내리치며 전북 홀대 지적…”전북은 대한민국 국토 아니냐?”
전북지역 국회의원들 중 유일하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인 그는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부 업무보고에서 탁자를 내리치며 이 정부의 전북 홀대를 지적하며 따져 물어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는 "주요 업무 추진 현황에 수백개 자치단체가 나오는데 전북자치도와 전북 기초단체 14개가 나오는 곳이 단 하나도 없다”며 “전북은 대한민국 국토가 아니냐?, 전북은 버렸는가?"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 후 이 의원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올해 국토교통부의 전북 신규 사업은 6건, 20억원에 불과하다”며 “윤석열 정부의 전북 홀대가 도를 넘었다”고 지적한 뒤 “정부 정책 기조의 전환”을 촉구했다. 이런 장면들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직후 대통령의 전북 민생토론회가 열렸지만 역시나 '알맹이 없는 가식적 토론회'였다는 비난이 더욱 높게 일었다.
이 의원은 18일 정읍에서 열린 대통령의 전북 민생토론에 대해서도 “선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윤석열 정부에서 전북 몫을 챙기는 건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쇼를 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이러한 비난 분위기가 고조되자 일부 언론들은 ‘전북에서 열린 대통령 민생토론회에는 예상에 없던 '깜짝 선물'도 있었다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는 의제들을 들고 나서 시선을 끌어모았다.
“윤 대통령 민생토론회서 대구-전주 고속도로 깜짝 선물?”…전체 맥락 생략, 어이없고 황당
해당 언론들은 ‘전북도, 전주·대구 직결 고속도로 건설 기대감 고조’, ‘윤 대통령 "대구~전주 고속도로, 신속 추진해보죠" 지시’, ‘윤 “대구-전주 출장 힘들더라” 동서도로 탄력?’ 등의 제목과 함께 윤 대통령의 민생토론회 발언 중 검사 시절 불편했던 대구-전주 출장 기억을 소환하며 동서고속도로 추진 의사를 밝혔다는 점만을 높이 부각시켰다.
“수조원대 예산이 수반되는 지역 숙원 사업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일사천리로 추진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보도와 “윤석열 대통령이 대구와 전주를 잇는 동서3축 고속도로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라고 주문했다”며 “대통령이 전북을 찾아 전주~대구 고속도로 건설사업 신속 추진을 약속함에 따라 새만금에서 포항에 이르는 동서축 고속도로망 구축에 속도감이 기대된다”는 등의 기사들이 눈에 띈다.
정말 황당하고 뜬금없다. 채 상병 순직 1주기를 맞아 수사 외압 및 구명 로비의 중심에 서있는 대통령이 고인의 고향인 전북을 찾아 알맹이 없는 민생토론회를 했다는 비난이 일자 즉흥적인 '동서고속도로의 신속 추진' 카드를 들고 나선 언론들도 문제지만 마치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한 듯 대통령 말 한 마디에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국가 사업임을 강조한 홍보 기법과 전체 맥락은 생략한 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 쓴 기사들을 보면 더욱 어이없고 기가 막힐 지경이다.
국가도로망 종합계획에 반영돼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와 경제적 타당성 평가 등 많은 과정을 무시한 채 대통령의 말 한 마디면 뚝딱 고속도로가 완성될 것처럼 호도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 정부 들어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두고 왜 그토록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여야 정치 공방이 격하게 가열되고 있는지 이해할 만도 하다.
“국민 거부 대통령, 유일한 답은 국민 거부권 행사”
가뜩이나 '채상병 특검법'을 비롯해 국민 다수가 선출한 국회에서 의결한 법안들을 줄줄이 거부하는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 3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대장동 50억클럽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 채상병 특검법(2회), 전세사기 특별법, 민주유공자예우관련법, 농어업회의소법, 지속가능한 한우산업 지원법 등 총 15번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를 많이 지지해 준 영남지역에서조차 최근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자신을 포함한 대통령실 등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수사 외압에 대한 특검 수사를 막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면서 "일관되게 국민을 거부하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유일한 답은 국민의 거부권 행사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더니 전북지역을 찾아 전북 차원에서 풀기 어려운 대광법 개정과 남원 공공의대 설립 등 숙원 사업의 지원 요구에 묵묵부답했던 윤 대통령이 ‘맹탕 토론회’ ‘팥소 없는 찐빵 토론회’라는 혹평이 나오자 깜짝 선물로 동서고속도로를 내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책상을 '탁' 하고 내려치니 '깜짝 놀라' 내놓은 선물인가?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