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 핀 '꽃심' 이야기...심청이와 이토정이 살던 '복숭아 꽃동네'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48)
한국인의 영혼 노래 '고향의 봄'은 우리네 고향 마을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꽃피는 산골로 그렸다. 땅이름에 꽃이 들어간 곳은 귀한 자손이 번성하길 바라는 인문학적 염원을 새긴 지명이다. 옛날에 매화꽃이 많이 피어서 매산, 매원, 매남이라거나, 연꽃이 많아서 연화촌, 연지동, 연화봉이라 했다는 식의 유래설명은 한국 전통문화의 바탕사상 인식이 부족해서 저지르는 잘못이다. 옛날 평화동네거리에 큰 꽃밭이 있어서 꽃밭정이라 했다는 설도 대표적 오류다.
꽃이름이 들어간 대부분의 지명들은 살기 좋은 터라는 매화낙지, 도화낙지, 모란반개, 연화부수, 연화도수, 작약반개, 작약미발형 등 풍수형국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이 땅이름에는 후손들이 자자손손 꽃향기처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인물이 되고, 무성한 열매처럼 자손이 번성하길 기원하는 간절한 비나리 기도가 담긴 지명인 것이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듯, 인물은 고향 땅기운을 받고 태어난다. 효녀 심청의 고향은 복숭앗골 도화동이다. 박헌봉이 엮은 <창악대강>에 수록된 가사체 춘향가 사설은 "절대가인 생겨날제 강산정기 타서난다. 송악산이 수려하여 황진이 생겨나고, 양천초당 절승하여 허난설헌 살았었고, 멸악산맥 도화동은 심낭자 종출이라, 호남좌도 남원부는ᆢ"으로 시작한다. 효녀심청은 멸악산 도화낙지 명당발복이고, 조선 제일 여걸 황진이, 허난설헌도 산천정기 덕분이라 한다.
마포구에 토정로라는 도로명으로 기록된 인물, 토정비결 저자라고 알려진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1517년 ~ 1578년) )은 소년시절 마포나루 도화낙지 도화동에서 흙집 움막정자를 짓고 살아 호를 토정이라 했다. 미당 서정주도 스승 석전 박한영 대종사를 만나기 직전 시기인 만18세 당시 고향인 고창에서 상경하여 마포나루 인근 빈민촌에서 넝마주이 생활로 방황기를 보낸 곳도 바로 이곳 도화동이었다. 토정과 미당의 비범한 기인행각도 도화낙지 기운 탓이었을까?
전주 완산칠봉 '꽃밭정이'는 꽃대궐 명당
고매한 인격을 상징하는 매화향처럼 고결한 사람향기가 세상에 퍼져나가듯, 귀한 자손이 이어진다는 대표적 매화낙지는 칠곡군 왜관의 이수성 전 총리 생가마을 매원이다. 안동 하회, 경주 양동과 함께 영남 3대 길지로 꼽는 곳이다. 칠곡인물은 매원에서 다 나왔다고 할 만큼 이총리의 광주이씨 집안은 종택인 대사헌 이원록이후 현대까지도 걸출한 인걸들을 배출한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이 집안 후손이다. 매원의 사람키우기 전통을 잇고자 칠곡군의 군화도 매화로 정한 것이다. 군의 꽃을 정하는데 인문학적 고려를 한 대표사례다.
또 한 곳은 3성 8현이 나올 충청 제일 길지라는 부여의 곡부실, 곡부서당 마을이다. 이 서당에서 서암 김희진 선생을 만난 서울법대생 김기현은 세속적 출세길인 고시공부를 버리고, 한학에 입문하여 동양철학자, 퇴계학자로 전북대 교수, 고전번역원 전주분원장을 역임하며, 이 시대의 선비로 학처럼 고고한 삶을 살고 있다. 해동경사연구소장 성백효, 성균관 한림원장 김신호 선생 등도 이 서당 출신이니, 매화꽃명당이 한국 현대 유학의 산실인 셈이다.
완산칠봉 외 7봉 삼천·평화동 방면 꽂밭정이 네거리도 옛날 큰 꽃밭이 있어서가 아니라, 풍수상 꽃명당 단지라서 꽃밭정이다. 완산칠봉중 삼천동 쪽에서 오르는 봉우리가 도화봉, 매화봉, 모란봉으로 도화낙지, 매화낙지, 모란반개형으로 풍수상의 꽃대궐 명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매화봉은 완산도서관 뒷편 내 7봉에도 또 하나가 있다. 곤지봉 뒤가 매화봉인데, 남부시장에서 완산7봉으로 건너는 다리가 매곡교이다. 매화낙지 매화봉 골짜기 가는 길이라서 매곡교(梅谷橋)인데도, 매화봉과 매곡교 유래를 기억하는 전주사람도 드물어서 아쉽기만 하다.
전주사람이 매곡교를 매일 건너면서도 매화봉과 매화꽃 지는 사연도 모른다면, 완산칠봉의 역사와 풍류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기에 필자가 전주시 공원담당 국장시절에 1,2,3봉 식으로 아무 의미없이 세운 표지판을 고증을 거쳐 본디 이름을 찾아 주었고, 평화동사거리도 꽃밭정이 네거리로 도로명을 바로 잡았다.
왜 못다핀 꽃, 떨어진 꽃이 좋을까?
매화는 매란국죽 사군자의 으뜸이다. 추운 눈속에서 피어나는 설중매는 강인하고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퇴계선생과 고창유학 보정 김정회 등 선비들이 매화를 연인 삼아 수백편의 한시를 남겼다. 철골개화(鐵骨開花), 수백년 묵은 고매에서 피는 매화는 군자정신, 구도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국의 천연기념물 고매는 백양사, 선암사, 화엄사 등 고찰에 다 있고, 고승들 거처에도 매화를 당호로 쓰기도 했다. 흔히 연꽃은 불교, 매화는 유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우리 전통사상은 항상 유불선이 하나로 어울어지는 포용사상이다. 송나라 유학을 꽃피운 대유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꽃중의 군자라고 평하는 연꽃애찬론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다. "연꽃은 진흙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ᆢ향기는 멀리서도 더욱 맑고, 고요하나 꼿꼿이 서 있는 꽃 가운데 군자로구나."
이왕이면 꽃은 활짝 핀 꽃이 좋지 하필 떨어진 꽃이 좋다고, 길지명당은 꽃떨어진 자리란 말인가? 여기에도 한국전통사상의 우주순환 법칙이 숨어있다. 근묘화실(根苗花實), 뿌리에서 싹이나고 꽃이 피고지고 열매맺는 게 식물의 순환법칙이다. 이것을 춘하추동의 변화, 조부모, 부모, 나, 자식으로 순환하는 집안의 승계번성, 명리학에서는 연월일시 사주에도 비유한다.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기에 개화보다 낙화가 좋다고 본 것이다.
익산시 용동면 화실리라는 지명도 여기서 화실을 취한 것이다. 모란과 작약의 경우는 못다핀 꽃을 선호한다. 작약미발형, 모란반개형처럼 떨어진 꽃보다 덜핀 꽃을 좋다고 쳤다. 커져가는 희망의 초승달과 반달을 보름달보다 좋게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위에 사는 연꽃은 물위에 떠있는 모양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지고 연실이 무거워져 수면을 향하는 모양인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이 있다.
고창 대표적 연꽂 명당, 원불교 성지
고창의 대표적 연꽃 명당은 선운산 연화봉, 심원면 화산리 연화마을, 대산면 연동, 연화마을, 무장 덕림리 연화마을과 사찰 연화사, 성내 덕산리 백련, 생근마을, 아산 호암마을이다. 특히 심원면 연화봉 초당터는 원불교 새 회상을 여신 소태산 대종사께서 개교직전 혹한의 겨울삼동을 정진한 성소로서, "소태산 연화삼매지"로 고창군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원불교성지다.
대표적 매화낙지 명당은 대산면 매산마을, 아산면 학전리 매동, 매사, 해리면 나성리 매남, 신림면 만화마을 등이다. 대산 매산마을 광산김씨 입향조 김오행이 아호를 매은(梅隱)으로 지은 걸 보면 매화낙지에서 후손발복을 꿈꾸었으리라. 대산 중산리도 당초에는 매화낙지로 보고 풍매(風梅)라 했었다. 매화낙지에는 매실안이라고 하여, 앞산은 매실모양이 좋다고 한다.
아산 매동 동편 매사마을은 이 매실안이란 말이 매실앵이, 매시랭이로 변하다가 한자표기로 매사(梅査)로 변천한 지명이다. 대산면 춘산리 작약봉과 약산마을은 피어나는 작약꽃 작약미발형이다. 그밖에도 무장면 송현리 작약동, 고창읍 화산리, 아산 남산리 꽃뫼, 무장 송계리 꽃봉, 해리 방축리 만화, 무장면 만화, 매산, 연방 등이 꽃동네다.
자손과 인물 번성을 기원한 매화낙지의 뜻을 살린 학교이름이 대산면 매산초등학교다. 인재양성의 요람이었던 농촌학교들이 인구절벽과 지역소멸 시대를 만나서, 매산초교도 폐교위기에 처했다. 학교와 집안과 지역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게 사람에 달렸다. 좋은 생각 선한 행동을 지혜롭게 실천하는 고창사람 키우기가 열쇠다. 마을조사를 하다보니 예전에는 마을회관 건립비에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록한 곳이 꽤 많았다. 요즈음은 회관짓는 데 돈낸사람 이름과 이장, 노인회장 등 추진위원 명단만 새기는 세태를 보면서 퍽 안타깝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지구촌 살릴 유일한 힘은 꽃심
내 고향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자긍심을 갖는 게 자기정체성을 찾는 출발선이다. 우리 마을이름에는 나를 살리는 무진장한 기도의 힘과 한류의 무한콘텐츠가 담겨있다. 고향을 사랑한 최명희 작가의 불후의 명작 <혼불> 속에서 전주, 남원, 전북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냈는가? 꽃심을 지닌 땅, 전북에서 낳고 자란 최명희의 꽃심은 21세기를 이끌어갈 문화력, 이른바 소프트파워다. 그윽한 매화향처럼 청정한 연꽃처럼 은근하면서도 웅숭깊은 한국문화의 저력으로, 나라와 지구촌을 살려낼 귀한 자손들이 번성하길 간절히 기도하는 신새벽이다.
높고 빛나는 뜻의 기도를 높을 고창 땅에 새겨주신 선조들의 속깊은 마음씨와 인문학적 식견에 새삼 탄복 감사한다. 매화가 꽃으로 엄동설한을 녹여내고, 진흙탕 속에서도 고결한 연꽃을 피워내듯이, 정신과 뜻이 돈과 권력을 이겨내는 사람 농사가 지역을 살리는 길이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지구촌을 살릴 유일한 힘은 꽃심이기 때문이다.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