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도운 '오익창'...숨겨진 '명량대첩' 1등 공신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45)

2024-06-23     유기상

세계 전쟁사의 불가사의한 승전 기록이 명량해전이다. 전투함 기준 10대 1, 지원함포함 25대 1 절대열세 전력을 극복하고 이순신 함대가 완승했다. 이 날 전투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의 끝머리는 "차실천행(此實天幸), 이 승리는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라 적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 법이니 일마다 순조롭다는 이 말은 <주역 계사상전>에 나온다.(自天佑之 吉无不利). 늘 고난과 걱정속에서 싸워야했던 이순신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척자점이라는 간이주역점을 쳤고 하늘의 뜻을 의사결정에 참고했다. "인간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한 충무공이 지극히 정성된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간절한 공공심으로 하늘을 감동케 하여, 23전 23승이라는 세계전쟁사의 전무후무한 전과를 낳은 것은 지성감천, 천인상응(天人相應)의 경지였을 것이다." (유기상, 황윤석의 주역점과 이순신의 척자점 비교)

한국의 명장 가운데 삼국지 제갈공명급 전략가는 누구일까? 필자는 주저없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꼽는다. 국난 중임에도 내로남불 당파싸움으로 쓸데없이 간섭하고 시기질투하는 왕과 조정 등 최악의 여건에서 거둔 23전 23승은 해전역사상 불멸의 기록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경지다. 이순신 승전전술은 일본 등 세계 해군들의 필수 연구대상이고, 일본에서는 군신으로 섬기고 있다. 근대 일본해군이 대영제국,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것도 이순신 전술을 연구한 결과였다. 천도에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인간과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기적의 승전보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도 하늘의 뜻을 묻는 주역점 사례가 자주 나온다.

또 하나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백성들이 이순신을 믿고 따르고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그간 육군 의병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군 의병장, 명량대첩의 핵심인물이 고창사람 사호공 오익창(1557 ~1635)이다. 하늘이 함께 한 불멸의 이순신, 불가사의한 승전인 명량대첩, 그 뒤에는 피난민을 규합하여 후방지원과 이순신 함대 전술운용을 목숨걸고 지원한 바다 의병 사호공 오익창의 눈부신 활약이 숨겨져 있었다.

땅에는 곽재우, 바다에는 오익창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선조는 별수 없이 이순신을 해군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한다. 1597년 7월 22일 통제사 재임용 후 이순신은 지난날의 덕망과 인맥을 활용하며 전라도 지역을 두루 거치며 15일만에 최소한의 수군진영 응급정비와 전투준비를 했다. 누구보다 전라도를 잘 아는 이순신을 전라도 선비와 백성들이 믿고 도와준 결과였다. 이 민관군 혼연일체의 결과 이순신을 신으로 만든 명량해전 승전을 기록한 것이다. 불과 13척 전함으로 전투함 133척, 군수지원함 포함 330척을 상대하여 이긴 기적을 만들었다. 한국사 최고의 명장 이순신의 전략과 리더십이 신화가 되는 장면이었다.

이 승전의 밑바탕이 된 고창 수군 의병장 사호공 오익창의 공적은 그간 햇빛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조선후기 최고의 문장가인 서명응의 전기와 채제공의 묘갈명이 그 대강을 전해준다. 정조의 절대 신임을 받은 영의정 채제공(1720~1799)이 쓴 묘갈명은 그의 문집 <번암선생집 49권>에 실려 있다. 묘갈명을 발췌 의역하여 오익창의 생애를 살펴본다.

사호공의 이름은 익창이고 함양 오씨다. 조부 오세영이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전라도 무장현에 은둔한 이후 자손들이 이곳에 세거하였다. 부친 진사 오인과 생원 이학의 따님인 모친 사이에서 1557년 태어났다. 공은 14세에 <성리대전>을 외울 정도로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신동으로,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당대 최고 문인이던 백호 임제(1549~1587)와 함께 선운산에서 수십일을 교유하였다. 임백호가 공에게 "내가 일찌기 호남의 독보적 존재라 자부했는데 이제는 자네에게 양보해야겠네"라고 말했다. 정유재란시 충무공 이순신이 통제사로 왜적을 막았다. 원균이 패배한 직후라서 전선은 12척인데 적군의 배는 바다를 덮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 피난가는 사대부들 배는 수 천척이었으나, 통제사의 군세가 약한 것을 보고 사방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공이 울면서 설득하여 말하길, "공들이 흩어지면 통제사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통제사의 응원이 없으면 적은 우리를 가볍게 보고 진격해 올 것이고, 나라가 없어지게 된다. 어찌 나라가 없어지는데 그대들만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읍소하니, 모두 동조하였다. 이에 피난선들을 연결하여 통제사의 군선 후방에서 응원하여 사기를 돋구고, 적에게는 아군의 규모를 과장해 보이게했다. 군사들이 추위에 떨자 옷을 걷어서 보급했고, 적탄을 방어하기 위해 솜이불 100여장을 모아서 물에 적셔서 방탄막을 삼게했다. 군사들이 목말라 힘들 때 박의 일종인 동과를 공급하여 수분을 보충케 하였다. 통제사가 공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겨 조정에 천거코자 했는데 마침 통제사가 전사하고, 공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알고 제원찰방에 제수하였다.

거북선 제작 참여, 호남5신을 구해낸 오익창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군량미로 쓰도록 의곡을 모아 강화도 행재소에 보냈으니, 충의가 펑소 쌓인 행동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재능으로 왜적을 막고, 충심으로 사악함 물리쳤네. 사람들은 빌붙으나 나는 은둔하여, 호수와 바다를 집삼아 사네. 요즘 사람들을 보아하니, 권세가 두려워 엎드리네. 공의 묘소를 지나거들랑 부끄러운 줄이나 알게나."

오익창 묘갈명의 정유재란, 명량대첩 공적 기록들은 <사호집> , <번암집>, <보만재집>, <호남절의록>, <고창의 유학 > 등에도 상세하다. 특히 공이 거북선 제작에 참여한 사실이 문집에 나온다.

최근 함평문화원 발표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논문에 따르면, 함평의 대선주인 송제민은 스승 정개청의 문인들인 오익창, 나대용 등 양명학자들과 영산강 인근 무관들과 함께 함평 대굴포 앞에서 거북선을 건조했다. 송제민이 상선 29척을 이순신에게 기증했다는 기록은, <난중일기> 1592년 2월 8일자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배 29필을 조달받았다", 다시 3월27일자에는 "거북선에서 대포쏘는 실험을 했다."는 기록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고한 호남의 인재, 조선의 인물들을 당쟁 갈등으로 몰살시킨 이른바, 기축사화, '정여립모반조작사건'의 무고한 피해자의 억울함을 살펴달라는 상소를 용기있게 올렸다. 정개청, 이발, 이길, 유몽정, 조대중 이른바 호남 5신의 사면청원을 했다. 상소문 마지막 문장인 "반드시 죄없는 자를 놓아주는 것은 성왕의 법도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는 글처럼 목숨을 걸고 의를 행한 것이다.

가진 자, 배운 자의 책무를 솔선한 오익창 가문

가진 자와 배운 자의 책무를 실천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화합한다. 지배층이 노블레스오블리제를 솔선해야 국가정통성이 굳건해진다. 임진왜란 2년 뒤인 1594년 전라도에 기근이 몹시 심해지자, 사호공은 집안 살림을 내어 혹 죽을 쑤어 베풀기도 하고 혹 마른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니 사방의 사람들이 진휼청으로 가지 않고 공에게 와서 목숨을 보전하였다. 때마침 노략질 하는 무리가 공의 집을 지나갔는데, “어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침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공덕에 감복하여 그냥 갔다. 오익창의 후손들도 사호공의 유훈을 받들어 집안에 소장한 고문서 일체를 국립전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무장의 함양오씨 집안소장 유물인 교지 10여건, 간찰, 노비문서 등 다양한 고문서 수십 건을 모두 국가에 기증하여 연구사료로 활용하게 하였다.

오익창 전기를 집필한 북학파의 비조라 칭하는 대제학 서명응(1716~1787)은 수군 의병장 오익창을 육상의 곽재우와 비견할 인물로 평가한다. "임난시에 기개높은 선비가 많았으니, 홍의장군 곽재우와 사호 오익창 같은 분이다. 곽재우의 경우는 전기에도 실리고 노래로도 불려져 세상사람 가운데 빛나건만, 오익창은 그러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이 아쉬움을 채우는 일은 오롯이 후학들의 몫이다. 상벌과 보훈을 바로 하는 일이 국가사회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열쇠다. 목숨걸고 싸워이긴 이순신을 죽이려는 조정세태를, 이순신의 평생 후원자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적었다.

"명의 참담한 패장 양호를 변호하는 데는 온 조정이 혈안이 되어 패장을 명장으로 떠받들고, 자기 나라의 명장은 명장임에도 패장보다 더 비참하게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것이 조선이다."

정부나 국회나 정당이나 국익은 없고, 오직 내로남불 당리당략 싸움질로 날을 새는 오늘날 정치판을 꾸짖는 일갈이다. 가지고 누린 자들이 망친 나라를 의병들이 겨우겨우 구하고서, 다시는 통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남긴 쓰라린 교훈 <징비록>이 나온지 420년이 되었건만, 여전히 정치판은 그 모양 그 꼴이다. 임진 전쟁전후에 이이와 유성룡이 "이게 나라냐"고 통탄했는데, 오늘도 여전히 국민들만 이게 나라냐고 정치걱정, 나라걱정 하는 하는 것 같아 우울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