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예술혼 사르는 서화가...여태명

[인물 탐구] 효봉(曉峰) 여태명(余泰明)

2020-09-05     이강록 기자
효봉 여태명

“끝이 없는 예(藝)의 밭을 일구어 가면서 뒤를 한번 돌아봅니다.

아무리 떨치려 해도 샘솟는 풋풋한 비린내를 어찌 한 두 겹 휘감아서 숨길 수 있으리오만 광주리에 새참을 이고 올 아낙이 있어 함께 땀을 흘리렵니다.”

서예가 여태명(余泰明)은 제1회 개인전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 개인전은 결혼展이었다. 1988년 7월 16일의 일이다. 여태명은 11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부터 집안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짊어진 짐의 무게가 버거웠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함께 살아갈 아내가 힘이 돼서였을까. 예술의 길이 험난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감연히 발길을 내디뎠다. 효봉(曉峰)의 이런 마음가짐은 지금까지 끊김 없이 이어져 온다.

오늘날 한국 서단에서 내로라하는 뜨르르한 명성을 휘날리는 서화가이지만 그도 신산(辛酸)의 세월이 어찌 없었으랴. 그 세월을 견디고 이제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서단의 큰 예술가로서 묵직한 걸음을 걷고 있다. 대학 강단의 가르침도 곧 접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러나 효봉 여태명(64·원광대 미술대 교수)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걱정이다. 끊임없이 궁리하고 모색하고 창작하는 예술가 여태명의 삶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서예란 문자로 만드는 예술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고 했다. 즉 글씨와 그림은 본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암각화를 보면 그림과 문자가 섞여 있다. 문자는 다양하게 발전했고 그 문자를 소재로 한 예술이 곧 서예 아닌가.”

서예란 문자를 가지고 하는 예술인데 문자는 본래 그림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효봉의 작품들이다.

“서예란 글씨의 예술 그 자체일 뿐 결코 피상적인 법(書法)도 도(書道)도 아니다. 여기에 우리의 뜻이 있다. 따라서 예술에 있어 법과 도는 수단적 방법이나 이상적 목적은 될 수 있어도 유어예[遊於藝: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예술에서 노닐다’의 뜻. 六藝(禮·樂·射·御·書·數)를 배우다] 정신의 예술 자체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파(物波:서예 연구동인) 창립취지문>에서 밝힌 대로 효봉의 글씨예술에 대한 생각은 그랬다.

특히 〈중용〉의 ‘과불급(過不及)’ 사상에 비춰볼 때도 일본 서도의 도(道)는 한국서예의 예(藝)에 있어서는 지나침(過)이요, 중국서법의 법(法) 역시 서예의 예(藝)에는 못미침(不及)일 따름이다. 효봉은 이것이 동양3국에 있어서 한국서예의 우수성이자 미래를 향한 세계성을 확보하는 가능성이라고 판단했다. 1997년 4월에 효봉은 21세기는 어차피 문화 경쟁의 시대이니만큼 세계화를 위한 차별화를 꾀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조류라고 진단했다.

무엇보다 ‘서예가 밥(物)이 되지 않으면 예술도 될 수 없다는 극명한 시대적 명제를 망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전통서법과 현대서예를 넘어서’ 中〉

효봉은 ‘물파(物波)’ 동인들과 함께 취지문을 통해 이처럼 드러내놓고 다짐했다. 예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배곯고 굶주려야 한다는 고식적인 폐습을 탈피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예술의 목적에 대해 다른 예술인들처럼 빙빙 에둘러서 눙치거나 말을 배배 꼬아 생각을 모호하게 흐리지 않았다. 단칼처럼 서슬 퍼랬고 수정처럼 명징했다.

“한자 한문에 문외한인 현대의 서예 감상자들의 표정 없는 반응에 맞닥뜨리게 될 때마다 느꼈던 그 공허, 그것은 뭇사람이 더불어 쾌감을 누리고 함께 생각하게 되는 美의 세계가 곧 예술이 탄생시키는 휴머니즘이라는, 평소 제 소견의 내면에서 반향(反響)하는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선비然하는 오만한 태도로 그들 앞에 독야청청할 만큼 감정이 무디지 못해 많은 시간들을 번뇌로 마음을 괴롭히다가 제가 만난 세계가 바로 백성들이 글씨였습니다.

도자에 각인된 한글, 서간에 나타난 그 고졸(古拙)한 숨결, 거기에는 비록 기교는 없으나 절제된 균형이 있고, 자연스러움이 있고, 호탕한 기상이 스며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장구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구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 같이 어우러져 있는 격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민간서체(民間書體:약칭 민체)’라 이름하고 현대에 접목시키고자 천착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모두 열세권의 ‘한글 자본(字本)’을 제작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두 권을 출판, 전시회를 갖게 됐습니다.” <미와 휴머니즘 –書·畵·刻의 ‘만남展’에 부쳐 중에서>

효봉의 금강안(金剛眼): 민체의 발견과 응용

옛 물품점 한쪽 구석에 먼지와 함께 차곡이 쌓여있는 누렇게 빛바랜 옛 필사본 서책들은 효봉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게 했다.

필사본 속에는 한글 궁체에서 볼 수 없는 자유로운 민중의 해학적 삶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민중 속에는 궁체 아닌 또다른 서체가 고요하고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그 물줄기를 발견한 기쁨과 감동은 또 다른 하늘을 열었다.

“처음 그 누구도 이 서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이 거대한 흐름을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민체’라 이름했다. ‘삶의 고향 마음의 고향’에 이 민체로 고향의 정취와 실향의 풍경들을 적었다.”

효봉은 항상 평범한 민초들의 삶으로부터 배우고자 했다. 한글 글씨라면 이미 궁체가 있었다. 궁중 여인들이 썼던 글씨다. 때문에 자획이 초서처럼 이어지고 휘어져서 알아보기 쉽지 않다. 효봉은 그런 궁체를 버리고 보통의 민초들이 썼던 글씨체를 따랐다. 필사본 소설·가사, 목판본 소설에 씌어진 글씨, 목간이나 도자기에 새겼던 글씨, 심지어는 만리장성의 전돌에 새겨진 글씨조차도 자신의 서예작품에 끌어다 썼다. 민초들의 글씨를 보라. 소박하고 인위적이지 않다. 어디 곰살맞게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된장 냄새가 나고 푸성귀 겉절이 맛이 난다. 효봉은 ‘바로 이것이다’하고 무릎을 쳤다. 민체는 그렇게 발견된다. 아니 탄생된다. 진흙 속에 묻힌 옥구슬이었다.

효봉은 볼품없다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전통 속에서 가치를 찾아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골라냈다. 버려진 것에서 값진 알짜배기를 찾아내는 안목, 그것은 바로 추사(秋史)가 말한 금강안(金剛眼)이었다. 효봉의 안목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선조들 글씨의 아름다움마저 미처 몰랐을 것 아닌가. 효봉의 안목이 감사하다.

민체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담긴 글자체

효봉의 글씨가 창의적이라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오듯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효봉은 오랫동안 우리 고전을 섭렵하면서 전통 글씨에 대해 샅샅이 뒤지고 깊이 궁리했다. 민체는 바로 그러한 산물이다.

민체란 바로 ‘백성들의 글씨체’다. 민체는 효봉이 개발한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써오던 글씨체다. 그것을 정리하고 재해석해서 명명한 이가 효봉일 따름이다. 때문에 민체란 전통적인 글씨체이면서도 창의적이다. 곧 뿌리가 깊은 글씨체다.

민체를 볼 때 갖게 되는 색다르지만 낯익고 친숙한 느낌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민체에 대해 효봉은 “보기에는 비뚤비뚤하고 자획이 넘어지고 촌스럽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고 예술적 혼이 담기고 철학이 있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효봉은 이런 철학을 갖고 1989년 처음으로 원광대학교에 서예학과를 설립하고 민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과정에서 그는 여러 지역의 민체가 서로 다름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호남지역(백제땅) 민체는 유유자적하고 낙천적이었다면 영남지역(신라땅) 민체는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웠다. 그렇게 지역적 특색이 있었다. 뒷날 중국에 와서 동북지역 민간에 전해지는 민체를 수집해서 연구해보니 글자체가 활달하고 힘차며 기상이 있었다.

민간 서체를 연구하고 민체를 이끌어내 한글 가운데 이처럼 크게 유행시킨 것은 추사 이후로 없었다. 일대 사건이다. 아마도 서예사에 이같은 쩌렁쩌렁한 울림과 파문은 없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업신여기고 같잖다고 했던 천덕꾸러기를 보배로운 존재로 만든 게 민체 아닌가.

효봉은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전통적이기를 강조한다. 전혀 근거도 없는, 난데없이 돌출한 서체란 존재하기도 어렵지만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효봉의 문인화가 그림과 글씨가 어우러져 있다는 것은 전통을 따른 결과다. 그러나 화제만큼은 우리 한글로 된 아름다운 시를 사용했다. 그래서 새로우면서도 낯설지 않다.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본보기다.

사실 효봉은 ‘중국통’이다. 효봉이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은 한중수교 전인 1989년 항주 소재 중국미술학원과 교류를 위해서였다. 그 뒤 10년 후 1999년에는 1년간 루쉰(魯迅)미술학원 객좌교수로 있으면서 원광대학교와 루쉰미술학원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 일조하면서 중국문화와 미술을 널리 연구했다. 여교수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기간을 이용해 두세 차례씩 중국을 방문해왔다. 이 기간에 중국 현지인들보다 더 많은 지역을 답사하고 중국 문화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 물론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숨어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근원을 찾기 위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여교수는 이미 여러 차례 중국에서 개인작품전을 열었고 심양 외에 항주, 상해, 북경 등 지역 교수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원광대 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박사생 지도교수로 활약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제자 가운데 문자예술 분야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교수 1명을 기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여교수가 지도한 박사학위자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 출신이거나 몇몇은 러시아, 일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여태명은 거시기다’

1998년 작품에 ‘여태명은 거시기다’가 있다. 자음과 모음, 지금은 사라진 반치음, ○×, 화살표, 알파벳 등등을 소재로 화면을 구성했다. 문자추상일까? 답은 작가에게서 찾아야할까? 아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가 찾아야 한다. 그러라고 던지는 화두와도 같은 것이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수수께끼를 하나 낸다. 여기서 거시기는 무엇을 가리킬까? 선문답처럼 답하면 ‘여태명이거나 세상의 모든 것’이다.

여태명은 여태명이다. 여태명은 이 세상 모두(※‘모두’라는 생각은 효봉의 ‘스승관’과도 이어진다)다. 마치 존재론의 명제 같거나 젊은이들의 ‘혼자 놀기’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힌트를 내놓는다.

“누워있어도 여태명, 뒤돌아 있어도 여태명, 자빠져도 여태명, 그것이 여태명이다”

여태명은 그렇게 말했다. 하여 그렇게 생각한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그러므로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 ‘여태명’이란 글자를 좌우대칭으로 반전시키거나 다른 글자를 반전시키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도 된다. 물론 이런 발상법은 ‘민체’를 창안해내거나 그만의 자음 ‘ㅈ’글자꼴(좌우로 반전시킨 모양)로 이어진다. ‘ㅆ’은 위아래로 ‘ㅅ’을 배치한다든지, ‘ㄹ’을 좌우로 반전하여 쓴다든지,ㆍ(아래아)자 사용이라든지, ‘ㅎ’을 겹으로 사용한다든지… 여태명만의 시도였다. 이런 파격적인, 그래서 창의적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자유롭되 격을 지키려는 의도 또는 법고창신의 소산 아니겠는가. 효봉은 수시로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모방과 답습은 쇠퇴와 소멸의 지름길이라고. 글자의 획 하나, 운필의 속도 한 순간도 중요하지만 어떤 글자를 쓸 것인가 늘 고민해야 한다고. 뭣 모르고 남만 따라가다가는 절벽 아래 바다로 빠져 죽는 레밍턴 쥐 꼴 난다고.

“서예를 배울 때는 대개 관체(관방서체: 관에서 주도했던 서체)위주로 되지만 자기 개성을 갖추려면 민체를 배워야 한다. 작품은 개성이 있어야 생명력이 있다.”

자기만의 체(體), 자기만의 꼴, 자기만의 개성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효봉의 생각은 늘 ‘자기만의 것’으로 나타난다. 작품도 그렇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강조한다. ‘예술은 창조작업이다.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라.’

“학서자들은 옛것을 따르고 배우고 이용하되 그 풍골(風骨)을 습득하여야 한다. 기초학습에 불과한 고전서법에 얽매여 자유롭고 개성있는 표현을 서예인 스스로가 막아왔던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시대적 요청과 시대성에 맞춰 개성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이런 남다른 생각은 작품은 물론 캘리그라피에서 여러 응용과 창안으로 발전된다. 여태명은 캘리그라피 분야에서도 일찍이 눈을 뜬 선각자다.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 협회를 만들고 실무에서 관련 내용을 발전시킨 주인공이자 초대 협회장이었다.

화가인가, 서예가인가, 전각장인가

효봉은 화가인가, 서예가인가, 전각장인가? 글씨도 쓴다. 그림도 그린다. 전각도 한다. 때로는 그 모든 것을 한 작품에 담아낸다. 그러니 뭐라 부를까. 그냥 예술가라 하면 너무 두루뭉술한가. 그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러니 화가라고 할까. 그러나 초등학교 습자부 이래 줄곧 글씨를 썼다. 지금은 글씨를 가르친다. 그럼 서예가라 해야 하나. 두꺼운 종이에 글씨를 새기는 지각(紙刻)도 한다. 그럼 서각장? 어쩌면 이런 분류 자체가 부질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호칭은 예술가다.

따지고 보면 한자는 사물의 형상을 본떴다 해서 상형문자라 한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을 구분짓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한글은? 한글 자음은 발음기관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모음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형상을 본떠 ·, ㅡ,ㅣ를 바탕으로 조합했다. 따라서 한글도 상형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모두를 효봉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터다. 그러니 ‘천·지·인’ 연작이 자주 등장했을 것 아닌가. 한글 서예부터 시작한 효봉이 한글의 회화적 요소를 발견하고 작품에 응용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효봉은 한글 자모를 그저 서예 도구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미적 대상으로 발전시켜 한글 자모에 사물의 형상을 담는 표현을 일찍부터 시도해왔다. 고전적 서예 기법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시도를 끊임없이 했다. 그럼으로써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한 의도였다. 그러니 효봉의 작품이 서예이기도 하고 회화이기도 한 것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시도를 머뭇거렸다면 오늘의 폭 넓은 표현은 불가능했을 테고 좁은 틀에 갇힌 ‘옹색한 예술’이 됐을 건 뻔한 이치 아닌가 말이다.

효봉의 새로운 시도들은 처음에는 눈에 설고 의아스러웠을지 모르나 이제는 하나의 전매특허처럼 자리잡았다. 표현 영역을 넓히려는 이같은 고민과 용기가 창의성이 생명인 예술 무대에서 제대로 먹혔다는 얘기다. 효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효봉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체와 답습 그리고 기존 관념의 고수는 창의적이라고도 창조적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이는 굴곡에 따라 흘러가는데 결코 유동적일 수 없다”면서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굴곡을 만나면 굴곡을 따라 휘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상황에 따라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효봉은 지난날 어떤 대가의 것도 따라하는 법이 없다.

서예를 시작하면 처음 따라 배우는 것이 스승의 글씨이다. 스승의 글씨는 이를 테면 중국의 대가 왕희지나 안진경을 따라 배운 글씨이다. 그런데 왕희지나 안진경이 처했던 환경은 지금과는 달랐다.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서 나온 글씨를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을 답습이라고 했다. 효봉의 글씨가 독특한 개성을 지니는 것은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황산곡을 배워야 황산곡을 알고 마침내 그 한계를 잊을 수 있다. 안진경을 배워야 안진경을 알고 결국 잊을 수 있다. 지양(止揚)이다. 그래야만 끝내는 새로운 자기만의 서체가 나올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궁체만 배워서는 판본을 모른다. 판본체를 알아야 궁체를 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서예 공부의 이치이다.

서예를 공부하면서 한글·한문을 가리지 않고 전각과 문인화를 함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 봉우리에만 머물면 그 드넓은 세계를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예술가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정판교가 그랬다지 않은가. 왕희지를 선망해 무수히 임서(臨書)를 했다. 꿈속에서도 임서를 할 정도였다.

어느 날 꿈속에서 왕희지를 임서하느라 옆에서 자던 마누라 등에다 대고 붓을 내리긋는 게 아닌가.

그러자 부인이 깨서 “자기 생긴 대로 하지 뭐 왕희지를 따라 한다고”하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정판교가 일어나 무릎을 탁 치며 깨달았다. 정판교는 그 후로 팔서를 능숙하게 썼다. 정판교가 그래서 유명하다.

효봉도 정판교와 같은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의구심을 품었다. 어제했던 것을 오늘도 하고 오늘 한 것을 내일도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서예인가. 예술이란 독창성이 중요한데… 예술가로서 고민이고 답답했다.

남의 시나 글을 읽으라고 써서 전달하는 것이 서예는 아니지 않은가. 그저 전해주기 위한 매개체가 서예는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효봉은 그제서야 서예라는 예술의 뜻을 알아챘다.

“나는 예술가다. 서예는 분명 예술인데 글자를 잘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다. 정신이나 마음을 집중하고 경건하게 쓰는 것이라면 사경이 있잖은가. 예의와 격식을 갖춰 사경하는 식이라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이라면 길을 걸어가다가도 아!하고 깨달아야 하고 느껴야 한다. 화장실에 있다가도 번뜩 해야 예술이다. 그저 목욕재계(沐浴齋戒) 이런 것이 아니다. 목욕재계 이런 것은 감흥이나 자세를 표현하는 것으로 도나 사경이라면 모를까 예술로서 서예를 생각할 때는 안 맞는다. 예술성을 표현한다는 관점에서 나는 그런 쪽 사람들과는 안 맞는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오로지 자기만의 것을 남기고 싶기 마련이다. 효봉은 자기만의 어떤 것, 일러 무슨 류(流)를 남기길 원했을까? 바로 자칭 ‘촌놈류’다.

“나는 촌놈이다. 서민이고 농촌 스타일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글씨는 그 사람을 따라간다. 심성이나 외형적으로 풍기는 이미지나 음식 모두 서민적이지 고급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내 자신이 그런데 뭣하러 도회스럽게 특출나게 하려 들겠는가. 내 스타일대로 서민스럽게 촌놈다운 글씨나 표현을 하면 된다.”

말이 촌놈답다는 것이지 민체를 사랑하는 데서 보듯 온 백성(모든 사람)이 쓰는 글씨를 쓰겠다는 것이 효봉의 글씨(서체)에 대한 생각이다.

마음과 뜻이 통일된 아름다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씹는 맛이란 보다 훌륭하다. 뜻이 깊되 마음이 거칠면 텁텁하여 그 뜻이 못 서게 된다. 이 또한 표현을 하려면 마음과 뜻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그의 견해다.

“서예술은 마음(개성, 자세, 필법, 장법, 조형, 내용, 형식 등)에서 우러난다. 마음을 표현하는데 뜻이 있다. 뜻(마음)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 더욱 어렵고 글씨는 엮는 것은 마음으로 된다. 마음(뜻)은 기백을 주로 하며 기백이 높고 낮음에 따라 마음(뜻)이 깊고 옅은 것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기백이란 선천적인 것이므로 후천적으로 배워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백이 낮은 자는 글씨를 다듬어 맞추는 데에만 힘을 쓰고 마음의 뜻을 앞세우지 못한다.

이렇게 쓴 글씨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잘 다듬고 조각한 듯한 비문이나 예쁘게 그린 듯한 글씨로 하여 참으로 예쁘기는 하지만 글씨에서 깊고 함축된 마음(뜻)이 없으면 처음보기에는 잘된 듯하나 다시 음미하면 아무런 맛도 아름다움도 없어지고 만다.”<1999년 6월 중국 루쉰미술대학 연구실, ‘여태명 쓴 한글서예’ 머리말 중에서>

예술가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예술가란 창조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명칭이다.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사람에게는 예술가라고 하지 않는다. 아류 또는 에피고넨(Epigonen)이라는 폄칭이 따를 뿐이다.

훈민 한글서예학회전에 출품한 2004년 작품 ‘처음처럼’은 효봉의 ‘표현 방식’과 작품에 대한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처음처럼’에 ‘처’자가 두 번 나오니 그 글자를 조합해서 ‘ㅏ처’ 형태로 쓴 작품이다. 조형에 있어 창의적이고 흥미로우나 문자학적으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하는 견해도 있었다. 효봉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문자는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생략하거나 겹쳐서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 작품을 두고 문자가 틀렸다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서예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할 말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약간 다른 방향 얘기지만 서예가는 문자학자·한학자·시인·미학자·철학자가 동시에 돼야 하는지 저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반대로 한학자에게 서예가가 되라고 합니까? 문자학자에게 서예가가 되라고 합니까? 저는 작업을 하면서 제 삶 속에 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을 만들어가려 합니다.”

서예작품을 예술로 봐야지 학문이나 이론으로 보지 말라는 주문이다.

“예술은 유리 상자 속에서 벗어나 생활과 밀접하게 숨을 쉬어야 한다.”

효봉이 작업노트에서 강조한 것은 생활예술이다.

우리는 거개가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역사나 정치, 사회로부터 또는 실제적인 목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고정관념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왜 존재하는가? 그 자체의 미학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칸트가 말한 이른바 ‘무목적의 목적성’이 예술의 존재 근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 어디에 사회문화적 조건과 관계없는 미학이 존재하는가? 청자 빛깔이 한국의 가을 하늘과 관계없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무심하게 빚은 듯한 찻사발의 아름다움이 한국적 삶과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 청자나 분청, 백자가 아무 쓰임새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가?

그것은 다 쓰임새가 있었다. 생활 속에서 일정한 쓰임새를 지녔다는 말이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란 곧 생활의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효봉은 바로 그런 생활 속의 예술로 나아가고자 애쓴다. 그러기에 커튼이나 벽지, 심지어 장판지 등까지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삼는다.

예술을 저 높은 곳으로부터 끌어내려 우리의 생활 속에 안착시키려는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캘리그라피로 이어져 그것에 깊이 빠져든다. 전혀 불모지였던 우리 서단 풍토에 캘리그라피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뿌리내리도록 한 개척자가 효봉이다. 한국캘리그라피 디자인협회 초대, 2대 회장을 지내고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민족서예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효봉은 민체의 창안자(발견·독자개념화)이자 1인자로 연구·지도 뿐만 아니라 디자인을 통한 생활화에 앞장서고 있다. 1998년에는 한글 민체 폰트(字體) 개발 등 독보적인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서체는 효봉축제체, 효봉개똥이체, 효봉푸른솔체 2가지, 효봉흰돌체, 효봉검은돌체 6종이다.

또 서예·전각·문인화를 응용해 등받이·티셔츠·식탁보·창문가리개 등 아트상품을 개발하고 필묵생활용품, 생활예술품 개발을 지도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서예를 친근하게 만들어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스승이다” 효봉의 스승관

효봉은 항상 나 아닌 모두를 스승으로 여긴다. 어린이와 어르신,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배운다. 아니 세상 모두를 스승으로 모신다. 내가 상대를 스승으로 만드는 기술, 그것은 곧 내가 배우는 기술이다. 물론 서예 때문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았지만 세상사 모두를 그리 여긴다.

“나 이외의 모두가 스승이다. 첫 번째가 아내다. 가까이 있으니까 물어보기 쉽다. 백번 써서 좋은 것을 고른다. 서체나 구도를 서로 다르게 쓰기도 하고 크기를 다르게 쓰기도 한다. 그중 대여섯 개를 늘어놓고 이것이 좋아, 저것이 좋아? 물어본다. 그러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안 좋다고 얘기해준다. 비전문가일지라도 자기 생각을 얘기해준다.”

여기서 효봉은 일반인들이 생각한 것이 어떤가를 얻는다.

이럴 때도 있었다. 연년생인 아들 둘이 유치원 다니던 무렵, 큰 아이 작은 아이에게 효봉 작품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이 드느냐? 무엇처럼 보이느냐고. 아들들은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며 자기 생각을 말한다. 어린 아들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그 아이만큼의 눈과 생각이 있다. 천진함이거나 동심이거나 전혀 생각을 못했던 걸 얘기해 준다. 그럴 때 ‘아하, 이거구나’하고 느끼는 거다. 그런 생각을 내가 취한다. 취해서 내 작품에 끌어다 쓴다. 그러니 내가 배우는 거다. 물론 필법이나 자법을 배우는 게 아니고.

아들과 아내의 반응은 곧 내 작품을 가감 없이 보는 첫 번째 바탕이 된다. 그 다음은 응당 그 반응들을 작품을 만들 때 반영한다. 그러니 곧 아들과 아내가 내 스승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내 스승이다.

“그렇게 나를 가꿔 왔다.”

효봉의 이 한 마디가 그의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켜온 모든 것을 대변한다.

효봉은 서예와 회화 등 예술 일생을 두고 딱히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스승이라고 한정하지 않는다. 종교로 비유한다면 일종의 범신론이랄까. 모든 사람이 내 스승이라고 믿는다. 달리 말하면 내 배움의 의지가 모든 사람을 스승이라 여기고 그들에게서 배운다. “나는 자유스럽다. 누구 수제자라고 하면 은연중 그 사람을 닮게 쓴다. 모방이다. 그러나 내것이 없잖은가.”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큰 스님을 만나면 큰 스님을 죽여라)’ 선가의 말이다. 서예에도 원용할 수 있다. 언제나 스승만 따른다면 그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효봉은 여지껏 서예라는 외길을 걸으면서 독학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고교1년생 때 사군자를 배우러 한국서예학원을 다녔다. 여기서 운봉(雲峰) 이재수 선생에게 배웠다. 문인화도 그리고 한글도 썼다.

한글을 써보라고 해서 썼더니 “참 잘 쓰네”하고 감탄했다. 운봉 선생이 “자네가 원생들을 가르쳐라”라고 해서 학원 월사금은 1달만 내고 어느새 글씨 선생이 돼 버렸다. 효봉이란 호는 그 때 운봉이 지어줬다.

정신적으로 모시는 스승이라면 남정(南丁) 최정균 선생이다. 원광대에 최초로 서예과를 개설한 분이다. 운필이나 기법을 배웠다기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 스승으로 우러른다.

끊임없는 향학의지: 고구려 서체를 연구하고픈 소망

효봉은 지난 1999년 1년 동안을 중국대륙에서 보냈다. 자비를 들여 교환교수를 신청, 동북의 중심지 심양의 루쉰미술대학으로 갔다. 그렇게 까지 중국 땅을 밟고자 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애오라지 고구려 글씨체를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고구려 글씨를 연구하자니 북한 땅은 갈 수가 없고 중국이라도 가면 글자에 대한 허기는 면할 것이라는 요량에서다.

실제로 그는 옛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해 아쉬운 대로 벽화와 금석문은 물론 근현대 한글 필사본도 수집하는 소득도 거뒀다. 연변·흑룡강성·요령성 지역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때 글자가 씌어있는 것이라면 종이건 책이건 목제건 모조리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비석공장 비문이나 한약방 약방문등이 겨우 한 두 개씩 있을 뿐이었다.

대신 효봉은 서쪽으로 돈황과 남쪽으로 귀주까지 백두산, 계림 등 산지사방으로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사찰과 명승지를 보고 느끼고 배우고, 귀한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의 여행 체험들은 작품으로 표현됐고 지금까지 작품 활동의 풍성한 밑거름이 됐다.

길림성 집안현의 광개토왕비(好太王碑)를 직접 봤을 때의 감격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우선 엄청난 크기에 압도됐고 예서체에 가까운 글씨체는 웅혼한 힘이 느껴졌다. “내가 이 글씨체를 보려고 그렇게 목을 맸었구나 하면서 몸에 전율이 흘렀다.”

효봉은 돈황 석굴 일반실이 아닌 특실에서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중국의 중앙미술학원 벽화연구생들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기회는 다시 만날 수 없을 행운이었다. 효봉은 석굴의 조각 기법이 매우 다양함을 실감했다. 전각을 하는 입장에서 유심히 살폈다.

만리장성의 팔달령에는 무려 11번이나 가서 탁본했다. 갈 때마다 해가 비추는 각도가 달라서 여러 번 가도 다른 결과를 얻었다. 전돌에 아로새겨진 낙서는 무슨 힘으로 새겼는지 불가사의하다.

효봉이 나시족 둥파(東巴) 문자를 접한 것도 글씨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커다란 기쁨이었다. 이 때 본 둥파 문자는 작품을 할 때 종종 영감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교환교수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에는 북경 국립중국미술관에서 밀레니엄 첫 전시로 ‘여태명 예술실천’, 루쉰대학 화랑에서 대형 개인전을 열어 중국인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만리장성소견’, ‘돈황소견’, ‘천·지·인’연작 등은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어서 전시에서 한층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줬다.

서예란 뭐냐? 자문자답해본다. 글씨를 쓴 거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서예란 문자를 소재로 한 예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미감을 표현하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비롯한 육법[위진·남북조 시대 사혁(謝赫)이 제시한 그림을 그리거나 평가하는 기준이 될 여섯가지. 즉 기운생동,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刑),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 그중 제1법으로 제시한 기운생동은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를 이른다.]이 필요한 거다. 궁극적으로 서예도 조형예술이므로 그렇게 폭을 넓혀가야 한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것만 서예냐? 그렇지 않다. 내가 읽을 수 없는 것도 서예다.

“중국 사람들이 한글을 못 읽는다. 그러나 한글서예를 보고 감탄한다. 그러면서 서예라 하며 우리도 일본 글씨 작품을 보고 서예라 한다. 그러므로 불어·핀란드어로 써도 서예다(※효봉의 ‘평화’연작에 등장함). 기호·부호· 약속된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서예다. 못 읽고 파악하지 못해도 서예다. 나는 서예의 폭을 넓히고자 했다.”

효봉은 서예의 확장성을 고민한 끝에 그렇게 영역을 넓혔다.

‘평화와 번영을 심다.’남북 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

효봉은 지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심은 나무의 표지석 글씨 ‘평화와 번영을 심다.’를 민체로 썼다.

“믿을 수 없었어요. 보통 미리 한두 번 써보고 쓰다가 다시 쓰기도 하는데 그때에는 단 한 자도 머뭇거림 없이 썼어요, 아니 써졌어요.”

효봉은 “당시 역사적인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세계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 가슴이 벅차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TV로 지켜보던 그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벌써 2년 전이 됐군요.”라고 돌이켰다.

“60년 서예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글씨를 썼지요. 민체는 국민들이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겼어요. 나도 빨리 한번 그곳에 가서 기념촬영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군사금지구역이어서 쉽게 가볼 수 없어 아쉬워요.”

효봉은 “평화의 길로 가는 남북 정상회담에 내 작품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당시 두 정상이 말한 것처럼 한반도 평화 선언이 다시 뒤로 가지 않아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두 정상의 직책과 날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서체를 혼용했다. 본문과 사람 이름이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를 향한 효봉의 염원은 오래전부터 고스란히 작품으로 드러난다.

2015년에 운필한 ‘내가 아는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를 비롯,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아랍어, 나오어(라오스어)로 쓴 ‘평화’ 작품 연작은 큰 울림과 여운을 남겼다. 이 지구상에 평화를 깨뜨린 전쟁의 상처가 아프고 아팠던 나라들의 글로 쓴 작품들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글로 쓴 작품도 포함돼 있다.

끝내 2019년 3월에 붓을 잡은 ‘평화나무’ 제발에 효봉은 절절한 기원을 담는다. 가로 4m가 넘는 대작이다.

‘평화는 우리 세계인의 공통된 소원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갈망하며 오직 하나의 평화로운 환경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 전쟁을 제지하며 평화의 세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태양과 꽃나무 따스한 사랑이 가득한 인류의 집 지구촌에 세계평화, 인간화합과 사랑으로 꽃피워지길 바라면서 평화와 번영나무를 그리다.’

나라에 대한 무한한 애정

효봉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 베를린에 갔다. 종이생산 6백주년 기념 한·중·일 서예작가전에 초대됐다. 그때 참가하면서 디스플레이를 직접 했다. 당시 중국 일본 글씨는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한자로 쓴 한국 서예를 놓고 독일 사람들이 “왜 중국 글씨를 전시하느냐”고 의아해 했다. 나는 한글을 펼쳐 보여줬다. 그러자 독일인 큐레이터가 아하!하고 감탄하면서 수긍하는 거였다. ‘너희 나라 글자를 존중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이때 마음을 굳혔다. 전각·문인화도 했고 돌아가면 한글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야지. 그래서 ‘민체’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효봉은 2019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임정 100주년 기념식에서 서예 퍼포먼스를 펼쳤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미술관에서 열린 행사였다. 그는 가로 5m 세로 1.5m 길이의 천에 ‘대한민국’ 4글자를 써보였다.

‘대’자에서 ‘ㅐ’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다. 남과 북일 수도 있고 세계인일 수도 있다. ‘한’자에서 ‘ㅎ’의 머리를 시옷이나 ‘사람 人’으로 쓰고 ‘ㅎ’안의 ‘ㅇ’을 청홍 태극으로 그려 남북이 화목한 한 집안을 이룬다는 희망을 담았다. ‘국’에서 받침 ‘ㄱ’이 꼬리를 길게 드리운 것은 영원무궁한 평화와 번영에 대한 기원을 나타냈다. ‘대한민국’은 ‘남북과 세계가 한 집안으로 화합해서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누리자’는 이상을 추구한다. 더 넓게는 동서양이 화합해 함께 번영하자는 뜻도 표현했다. 이처럼 효봉은 작품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드러내 보여준다.

전주 톨게이트 현판글씨도 남다르다. 효봉은 안과 밖의 글씨를 다르게 써서 의미를 달리 부여했다. 전주로 들어오는 방향 현판에는 자음인 ‘ㅈ’을 작게, 모음인 ‘ㅓ’를 크게 썼다. 외지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오는 자식(자음)들이 어머니(모음)의 품에 안긴다는 뜻에서다. 반대로 전주에서 나가는 방향에는 자음인 ‘ㅈ’을 크게, 모음인 ‘ㅓ’를 작게 썼다. 객지로 나가는 자식이 크게 성공해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렇게 담았다.

병신육갑(丙申六甲)전은 2016년 병신년에 회갑을 맞아 연 전시회였다. 여기서 ‘병신육갑’이란 전시 이름부터가 재미있다. 그리고 글씨도 뒤집었다. 2019년 4월 평화와 번영 여태명전 전시도록에서도 ‘여태명’ 글자를 뒤집었다. 효봉 작품에 나타나는 반전 기법이다. 왜 그랬을까? 관람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궁금하니 기억될 것이다. 이런 약간의 일탈 아닌 일탈이 전혀 변화가 없는 밋밋한 전시보다는 괜찮다는 것이 효봉의 생각이다.

아내는 오늘의 나 있게 한 패트런이자 정신적 지주

“참 재능은 충분한 인재인데 누군가 뒤를 봐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가진 것도 없고 주위 친지도 하나 없다.

그러니 본인의 열정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있어야겠다. 내가 돌봐주면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다.”

서예학원 제자였던 서경주 씨(초등학교 교장)는 효봉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아내를 만난 것은 효봉의 일생일대 홍복(洪福)이다. 효봉은 스물다섯 살 때 한국서예학원 강사였다. 그 때 수강생중 한명이 지금 아내인 서경주씨. 아내와 만남은 어쩌면 짜여진 운명과도 같았다. 학교 교사인 아내는 서예 실습 중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 때 워낙 수강생이 밀리던 터라 실습자리를 비우면 다른 수강생으로 채워야 하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서선생의 자리는 꼭 비워 놨다. 효봉의 호의와 배려였다. 그것이 결국 호감을 샀는지 서선생을 아내로 맞게 됐다.

효봉은 서선생과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다. 1987년이었다. 당시에 서선생은 경기도 양평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11월 9일 효봉의 바로 아래 동생이 난치병을 앓다가 사망했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어마어마한 치료비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장 함께 부대끼고 함께 세상을 헤쳐 나온 동생이었다. 동생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다음날 동생을 화장하여 떠나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첫눈이 내렸다. 효봉은 몸도 가눌 수 없는 심정이었지만 서선생과의 약속은 저버릴 수 없었다. 양평으로 향했다. 효봉은 동생을 떠나보낸 대신 아내를 맞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1988년 결혼에 이르렀다.

11남매 중 장남인데 내게 시집 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집사람이 나를 선택해줬다. 그것도 나를 6남매라고 속여서 처가에서 겨우 허락 받은 결혼이었다.

효봉은 그때 이후로 여지껏 한 순간도 집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다. 고마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이해와 배려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건 남편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한다 합네 하면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 태도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내는 내색 하나 않고 그 많은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줬다. 등록금 등 학비며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일일이 챙겨줬다. 지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오로지 아내의 은덕이자 공덕 덕분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내 노력은 그저 몇 % 되지도 않는다. 그걸 잊으면 여태명은 나쁜 놈이다. 그렇게 항상 집사람의 고마움을 새긴다.

내가 그동안 책을 사서 모을 때도 아내는 “이제 책 그만 모으면 안돼?” 전시회를 열 때도 “그만큼 했는데 전시 이제 그만 하면 안돼?”하고 나즈막히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이해 못했다. 아내는 “못 도와준다” “빚 끌어다 일만 벌인다”라고 하지 않았다. 뒤에 가서야 아내의 고민과 힘든 점을 깨달았다.

“나는 여지껏 어려운 가운데서도 찾으려고 노력했고 끊임없이 일을 벌여 놨다. 뒷수습은 아내가 다 했다. 그러니 아내를 잊을 수 있겠는가.”

효봉은 아직도 연구나 창작 열정은 식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내가 없었다면 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을까. 모두가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내 예술의 패트런이고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다. 갈수록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

교수 정년퇴임 이후로도 할 일 태산 같아

돌아보면 내 예술인생은 굽이굽이 산모퉁이 길을 많이도 돌아왔다.

초등학교 때 습자부에서 시작해 6학년 중학입시반 때 첫 진안군 실기대회에서 미술부문 1등에 입상했다. ‘푸른 산 맑은 물’을 썼다. 처음 대회이니 그 감격은 컸다. 흡족해 한 아버지가 막걸리 열 통개를 냈다. 전주동중학교 3학년 때는 동중학교 상(像)을 제작했다. 어린 나이지만 손재주는 있었던 듯싶다.

전주고등학교는 특기생 구성(디자인)부문으로 입학해서 구성·조각에 열중했다. 그러면서 대입을 위해 한국화를 하리라 마음먹고 전북 최초의 서예학원에 찾아가 사군자를 배웠다. 대학은 원광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했으나 입대 후 복학을 하지 못해서 전주대에 미술교육과로 다시 입학했다. 그러니 미술이라면 이것저것 안 해본 분야가 없는 셈이다. 전주대 재학시절 81년도에 서도회를 창립했고, 대학미전 서예부문에서 대상인 문교부장관상과 한국화 특선을 동시에 입상했다. 2관왕이었다. 당시 전북도전은 서예와 한국화에 입선했다. 그렇게 지나온 산굽이길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지난 1997년 한 영화사가 ‘축제’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포스터와 자막에 효봉의 글씨를 무단으로 사용해서 저작권을 침해한 사건은 잊혀지지 않는다. 글씨 한 자 한자가 서예가의 혼과 미의 창조에 대한 열정이 녹아든 것이라면 어느 누구도 무단으로 그 작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서울지법이 글씨 한자에 1천만원씩 2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은 예술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된 바 있다.

대학교수 정년퇴임을 앞둔 효봉은 퇴임 이후로도 할 일이 태산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과제가 산적해 있다. 우선 소장하고 있는 서지, 전적, 문서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분류 보관하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2012년에는 문화재청에서 효봉이 소장하고 있는 동산 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바 있다. 보고서에는 소장 문화재 소설 필사본, 가사본, 서간, 동학 관련 판본류 등 수백점이 등록됐다. 녀샤서(女四書)·오륜행실도·유씨삼대록 등 희귀자료를 방치해 두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자료나 작품은 정리되는 대로 단계적으로 분야별로 공개했으면 한다.

그렇게 해서 필요한 연구자나 학자, 학생들이 이용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오래 전 벌여 놓은 한글 자전(字典) 발간도 마무리 하고 싶다. 1994년 판본체 용비어천가와 송강가사를 자전으로 만들어 발간했지만 앞으로도 판본류 3권, 궁체류 3권, 민체류 5권을 발간하려는 계획은 완성을 시켜야 할 텐데 마음이 바쁘기만 하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협조를 얻는다면 좋으련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여태명 선생

앞으로 대학 퇴임후에는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면서 작품도 하고 중국 작가·교수등 과 교류를 이어갈 생각이다.

아호에 얽힌 얘기를 해보자. 효봉은 앞서 말한 대로이고 거기에 맞춰 우리말로 만든 호가 새밝이다. 고향이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 중백암이다. 여기서 흰바위, 흰돌이 나왔다. 편석재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날을 돌이키니 강암(剛菴) 송성용 선생이 1986년 무렵 내 전각을 보고 한번 만나자고 한 적이 있었다.

“젊은 사람이 각(刻)이 좋다”면서 글씨를 세 점 써놓고 “어느 것이 좋으냐. 하나 골라 줘 보라”고 해서 그런 큰 어른이 왜 그러시는가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또 1973년 고2때 다가공원에 올랐을 때 일이 생각난다. 교복을 입고 공원에 올랐는데 전주 문화계의 큰 어른들인 강암 선생, 벽천(碧川) 나상목 선생, 남궁훈 교수(원광대미대 학장) 등께서 계시지 않은가.

나는 얼른 달려가서 그 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서예를 배우고 있는 여태명입니다.”라고. 그러자 그 어른들께서 기특한 학생이라는 듯 “오! 그런가. 열심히 공부하거라”라고 격려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벌써 50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구만.” 효봉은 자신의 서예 연륜만큼이나 세월의 연륜이 많이 퇴적됐음을 곱씹으며 회상에 잠겼다.


<참고문헌>

『여태명 예술 실천』 (이화문화출판사, 2000)

物波全集Ⅵ 『余泰明』 (물파아트센타, 2003)

「사랑노래 그림전」(인사동문화, 2006)

「새시작 새 도전– 여태명 병신육갑전」(디자인북스, 2016)

「평화와 번영- 여태명 전」(2019)

/이강록 기자(<사람과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