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창시자'가 태어난 곳에서 '민족 종교'를 생각하다
신정일의 '길 위에서'
'서해랑길'을 걷다가 찾아간 곳이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 선생의 유적지다. 보천교의 창시자인 차천자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지나간 역사를 회고했다. 호가 소태산(少太山)인 박중빈 선생의 어릴 적 이름은 '진섭', 청년 시절에는 '처화'라 불렸다. 농부인 아버지 성삼과 어머니 유정천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大宗師)라 불렀다. 7세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 이치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던 그는 20년 가까이 구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산신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했고 다시 도사를 만나려 고행을 계속하였다.
산신이나 도사를 모두 만날 수 없게 되자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빠지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해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우주와 인생의 근본 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태산은 스승의 지도 없이 스스로 깨친 진리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참으로 기쁘구나, 맑은 바람 솔솔 불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저절로 밝게 드러나도다.(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
진리를 깨친 지 몇 달 후 40여명의 신자를 얻은 소태산은 그들 중 신심 있는 제자 아홉을 선택하여 교단의 기초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바로 저축조합이었다. 1918년 3월에는 아홉 제자들과 더불어 영산 개펄 정관평 간척을 시작했고, 1919년 4월에 간척공사를 마친 소태산은 김제 금산사를 거쳐 부안 변산의 월명암에서 10여일 머무른 뒤 돌아왔다.
그 뒤 소태산은 변산 월명암 근처에 있는 실상사와 석두암에서 1919년 10월부터 1924년 4월까지 머물면서 새로운 불법을 제정할 준비를 서둘렀고, 변산의 초당 봉래정사(석두암)에서 처음으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했다.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였다. 부안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왔고, 그곳이 장소가 협소하였으므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1924년 5월 3일에 소태산은 전주 윤산동의 전음광의 집에서 서중안 등 일곱명의 제자들과 회상창립 발기인 모집을 가졌고, 이때 원불교 총부를 설립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전주와 정읍, 김제 등이 거론되었는데 마침내 익산 부근으로 의견이 좁혀지자 소태산이 정리했다.
“익산 부근의 토지가 광활하고 또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의 생활이며, 각각 회원들의 왕래가 편리할 듯 하니 그곳으로 정함이 어떠한가?”
소태산의 말에 발기인 일동은 의의 없이 따랐고, 1924년 9월 29일 신용리 344-2번지의 대지 3,495평을 매입하여 현재 원불교 중앙총부의 터가 되었다. 동학에서 증산교로, 원불교와 보천교로 이어진 게 남도의 민족 종교 사상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