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출신 '의인 논개', 어쩌다 진주까지...재평가 돼야

인물 탐구

2021-09-03     김미선 시민기자
진주 촉석루 아래 흐르는 남강에 놓인 의암(義巖)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 시인 변영로(卞榮魯)-  

진주 촉석루 전경

이 시는 수주(樹州) 변영로의 대표작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의 의로운 기생이었던 논개가 촉석루 술자리에서 왜장의 목을 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날려 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의로운 기생 논개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시로 표현한 이 작품은 변영로의 민족 관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다. 이 시는 논개의 애국적 절개를 노래한 초기의 작품으로 시집 '조선의 마음'(1924년)에 수록되어 있으나, 원래 발표는 1923년 '신생활'지 4월호에 발표된 시이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자유시는 비유의 대상들을 한국 고유의 꽃과 열매로부터 가져와 한국의 미와 절조(節操)를 드러내고 있다.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와 같은 비유는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과 꿋꿋한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민족의식을 세련된 기교로 노래한 이 시인의 대표작이다.

전북 장수 출신 논개(論介), 어쩌다 경남 진주까지?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의견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출신인데 그 먼 경상남도 진주에서 의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신분과 출생 등에 대해 분분하다.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과 친분이 있는 여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회자될 정도다.

그러나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그 아래 의암(義巖)에서 논개의 기록을 읽어 보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려 말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된 건축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의기(義妓) 논개', '의인(義人) 논개'로 바로 잡아야

촉석루 안의 '의기논개지문' 표지판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건물은 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1241년(고종 28)에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써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725년(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하였다.

촉석루 내에 위치한 논개 사당

이곳은 논개의 의로운 충절(忠節)과 의절(儀節)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런데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라고 표현한 대목은 씁쓸하게 한다.

굳이 기(妓)를 쓸 이유가 없는데 관기라고 적다니. 차라리 의인(義人)이라고 부르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돼 왔다.

사대부들의 몰이해로 의열 평가, 수백 년 지체되다니... 

그런데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라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한다. 게다가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한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의암(義巖)

한편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촉석루와 의암을 잇는 통로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출신보다 나라를 향한 충(忠), 군민을 위한 의(義)와 열(㤠)의 정신 더 중요

의인 논개 

논개는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소설과 시 속에서 여러번 등장하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그녀를 기리는 노래도 있다. 진주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진주시의 대표 캐릭터도 논개다.

논개가 기녀였냐, 양인이었냐 하는 신분이나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냐 아니냐 하는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의 죽음이 나라를 향한 충(忠), 진주성에서 희생된 군민을 위한 복수를 위한 것으로 의(義)와 열(㤠)의 정신적 발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분이 낮고, 직업이 천해서 그녀의 순절이 가진 정신과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이는 대단히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그래서 그녀의 순국이 더 숭고하고, 가치 있으며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때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이제라도 그 의미를 새겨 '의인 논개'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만 한다. (<사람과언론> 제9호 게재) 

/김미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