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성 높이 앉아 나주 풍경 바라보니 '충절'이 절로...'낙안읍성' 쌓은 수군 명장 '김빈길', 고창 빛낸 이름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39)

2024-05-12     유기상

일찍이 고조선 시대부터 천문지리학이 발달하였던 '높을 고창'은 수많은 고창식 고인돌을 해와 별자리 등 천문원리와 주변의 산세 등 자생풍수 지혜를 살려 조성한 탁월한 세계문화유산을 자랑한다. 마한시대 고창의 옛 이름이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 '모로비리국'임에 착안하여, 한반도 문명수도란 의미에서 '한반도첫 수도'라고도 불려지듯 유무형 문화유산의 보물창고가 고창이다. 

조선시대 국가사적인 고창읍성은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과 함께 대한민국 3대읍성으로 불리는 성곽도시다. 이 중에서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읍성이 고창읍성이다. 이에 더하여 2003년부터 20여 년동안 복원정비하여 석성의 원형을 되찾은 무장읍성도 국가사적이다. 무장읍성 보수중 발견된 조선시대 첨단무기 비격진천뢰가 11발이나 나온 것을 보면 고창이 호남우도 방어선의 요충임을 말해준다.

나주진관, 무장읍성, 고창읍성, 입암산성을 잇는 호남해안 방어망 핵심지역이 바로 고창이다. 한 지역에 완벽하게 보존된 국가사적 읍성이 두 곳이나 있는 곳도 고창 뿐이다. 호남가 가사에서도 "고창성에 높이 앉아 나주풍경 바라보니"라는 대목에서 나주진관 방어체계와 고창성의 중요성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3대읍성 중 낙안읍성을 쌓은 김빈길 장군이 바로 고창사람이고, 그 후손인 고성김씨들이 고창에 세거하는 사실은 잘 모른다. 조선초 1397년에 낙안읍성을 축조한 김빈길은 전라도수군절제사를 지낸 수군 명장이다. 요즘으로 치면 의병에서 사병, 해군 전라도 함대사령관으로 드날렸다.

흙수저 성공신화 김빈길 수사...사병에서 함대사령관, 우의정 추증까지

고창의 조선시대 충신 명장중에 유독 수군 명장이 강세인 것은 해양국가 마한과 해상왕국 백제의 조선술과 항해술의 유산 덕분인 듯하다. 조선초기 김빈길 수사, 조선중기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와 맹활약한 함양오씨 사호공 오익창(吳益昌 1557~ 1635),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분이라 수사공으로도 불리는 진주강씨 물기재 강응환(姜膺煥 1737~1795)이 조선시대 고창 출신 3대 수군 명장이다.

오익창과 강응환의 후손들이 집안가보 유물들을 고창군에 기증한 일도 있어서 두 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으나, 김빈길 장군은 600여 년간 고창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영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요인물이 죽으면 간략한 전기와 함께 인물평을 싣는다. 이것을 졸기(卒記)라 하는데, 조선 태종5년 1405년 10월 25일자에 김빈길 졸기가 실려있다.

"전라도수군도절제사 김빈길 졸기: 전 전라도수군도절제사 김빈길이 죽었다. 빈길은 항오(行五)에서 출신하여 군공으로 달관에 이르렀다.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 건의하여, 도내 요충지마다 만호를 두고 병선을 나누어 정박시켰으므로, 그 뒤부터 세곡을 운송하는 근심이 사라졌다. 여러 섬에 둔전을 설치하여 수군의 식량을 충족케하고 국고에서 주는 것만 바라는 폐단을 없앴다. 그래서 도총제를 가하였다.

죽으매 부의를 많이 주고 헌부에서 추후에 포장하기를 청하니,양혜란 시호를 주었다. 빈길은 충직근면하였으며, 수전에 능하였다. 군사가 병든자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치료해주고, 추위에 언자가 있으면 옷을 벗어 입혀주고, 항상 사졸과 더불어 감고를 같이 하였다. 도적을 쫒아 행선할 때는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군사들이 사력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이르는 곳마다 필승하였다. 늘 상을 받으면 군사의 공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변방의 백성들이 힘을 입었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김원량이다."

말단 사병(항오)으로 시작하여 오직 공적만으로 전라도해군사령관까지 오르고, 사후에 양혜공이란 시호도 받고, 우의정에 추증된 조선초기 흙수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지휘관으로서 인품도 훌륭했지만, 해양방어체계 구축과 세금운반선 안전항로 확보, 군량미 자급체계 등 많은 공을 세운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낙안읍성 쌓고, 현역 은퇴 후에도 고창 흥덕현 사진포에서 전사

김빈길(金贇吉, 미상∼1405년)의 아호는 죽강(竹岡). 시호는 양혜(襄惠), 본관은 고성 김씨다. 본래 조선초 태조 때의 무인으로 낙안 출신인데, 고창에 사패지(국가유공자로 왕이 준 경작지)를 받아서 고창현으로 이사와서 살다가, 늙은 몸을 이끌고 왜구를 치러 나갔다가 사진포(현 흥덕면 사포)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394년(태조 3) 전라수군첨절제사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투항해 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인하여 최운해(崔雲海) 등과 함께 국문(鞫問)을 당하였는데,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얼마 후 유배되고, 모두 수군에 다시 편입되었다. 1397년 왜구와 맞서기 위해 현재의 낙안읍성을 토성으로 쌓았다. 30여년 후인 1426년에 그 토성을 근거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현재의 낙안읍성과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말년에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낙안팔경을 노래한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일설에는 김빈길 장군의 고창 이주에 대해 "당시 남해안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가족과 함께 편히 지내려고 호남내륙 지역으로 피신했다"는 억측이 있다. 이는 고창 경방동(현 고창읍 신월부근)의 고려시대 고창오씨 사패지 중 일부를 김빈길이 사패지로 받은 사실, 경방동과 사진포는 이십여리 거리로 매우 가까운 위치인 점, 사진포는 전라우도의 주요진으로 고창, 장성, 흥덕, 정읍현의 세곡 해창이 있어서 왜구들의 잦은 공격목표였던 역사적 사실들을 간과한 억측이다. 민간인 신분의 늙은 퇴역장군이 기꺼이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충절과 군인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조선의 보훈제도를 바꾸게 만든 명장, 600년만에야 이름 되찾다

현재 고창군 고수면 남고창 나들목 근처에 김빈길 장군 묘소와 신도비 등이 있다. 진안군 안천면 소재 화천사에서 후손들이 매년 2월에 향사를 하고 있고, 낙안향교내 충민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필자가 두 번째 전북도 문화국장 시절인 2006년 하반기 무렵에 전 도립국악원장 김오성 선배가 문화재지정 신청서를 가지고 오셔서 김빈길 장군을 기록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고창출신 담당과장과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수차례 숙의 끝에 우선은 군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 이강수 군수께서 2009년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하면서, 6백년만에 공식적으로 장군의 유적을 고창군에서 기억하고 관리하게 된 것이다.

낙안읍성이 있는 순천시에서도 낙안읍성은 임경업 장군이 도술로 하룻밤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홍보하면서 축성공신 김빈길의 공적을 챙기지 못했다. 4년전에야 김빈길 동상건립을 시작으로, 창극제작 등 낙안읍성을 쌓은 영웅을 기억하고 기리기 시작했다. 역사는 역시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부여해야만 되살아난다는 사례이다. 낙안읍성을 찾는 고창사람들이 낙안읍성 축조자가 고창인물 임을 아는 이 얼마나 될까? 졸기 이후 두달 후에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에서, 그 공적에 비해 장례나 예우가 매우 소홀한 대표사례로 김빈길을 꼽았다. 요즘 말로 국가보훈제도를 개선하게 한 충절의 상징이 김빈길 장군이었다.

"김빈길은 항상 물위에서 나라의 장성(長城)이 되어 바다도둑을 막고, 집에서 생업을 다스리지 못한 지가 30여년인데, 이른바 나라뿐이고 집은 잊어서 충성이 사직에 있는 분이다. 그러나 역시 국가의 예장과 사시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이토록 명확한 공적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후학들이 기억하고 의미부여 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하물며 사서에 한 줄도 기록되지도 못한 역사야 굳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