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쌀밥꽃 보며 넘던 '보릿고개'...배고픈 민초들의 희망, '이팝꽃'으로 피어나다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38)
만화방창한 봄꽃 잔치의 4월을 지나고 5월로 접어들자 하얀 고봉밥 쌀밥같은 이팝 꽃이 환하다. 전주 팔복동 철도의 이팝나무길이 새로운 명소가 되어 화제가 된다. 천연기념물 이팝 가운데서도 가장 풍성한 고봉밥 같은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가 피기 시작하면 보는 이를 저절로 마음 부자를 만든다. 이팝꽃은 하얀 꽂장식도 어여쁘지만 쌀밥같은 모양이라 서민들에게 더욱 사랑받은 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릿고개라 불렸듯이 민초들은 늘 배고파서 고달팠던 역사다.
이팝나무는 양식은 이미 떨어지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초여름에 보리가 익는 망종까지는 한 달여 남은 보릿고개 꼭대기인 입하무렵 피어난다. 올해는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하얀 쌀밥 고봉밥을 실컨 먹어봤으면 좋겠단 염원이, 이팝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만들었다. 대부분 거목 이팝은 당산목이나 신목으로 동제나 당산제의 숭배대상으로 섬겨왔다.
중산리 이팝나무에 버금가는 자태를 자랑하여 천연기념물 지정절차를 진행중인 아산면 중복마을 이팝나무는 250여년 전에 밀양 박씨 중복 입향조 박사일(朴師一, 1734~1803)이 심은 나무라 하여 박씨의 제단이란 뜻의 박달나무로 불려질만큼 신성시 되어왔다. 오늘 새벽 두 신목을 돌아보니, 대산면 주요 도로변 가로수는 피기 시작하였고, 중산리 이팝나무는 아직 반개상태다. 중복마을 이팝나무는 남쪽가지 쪽만 피어나고 있으나 수세가 장관이다. 다음 주말쯤이면 활짝 핀 고봉쌀밥나무들이 볼만하겠다.
이팝나무는 어디서 왔을까?
이토록 배고픈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이팝나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귀하게 관리한다고 한다. 이팝나무를 입하철에 핀다고 입하나무라 했다거나, 한자로 육도목(六道木), 유소수(流蘇樹), 심지어는 이씨 조선 이씨의 밥이라 이밥나무라했다는 터무니 없는 궤변까지 떠돈다. 이씨 조선은 일제가 조선왕조를 비하한 말로 입에 올려서는 아니될 용어다. 산야초 이름들은 대개 생긴 모양을 보고, 늘 산과 들에서 사는 민초들이 짓게 마련이다. 이팝의 학명도 '하얀 눈같은 꽃'이란 의미다. 영어로도 하얀 꽃수술 모양 꽃이란 뜻이다.
필자가 어원 고증을 해본 결과, 쌀밥 같은 하얀 꽃이라 쌀밥, 이밥, 이팝나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글에서 벼 낱알을 니, 뉘라 했다. 쌀 속에 뉘가 있다는 용례가 그것이다. 니밥이 19세기 이후 두음법칙에 따라 이밥이 되었고, 이밥이 거센소리화 되어 이팝이 된 것이다. 조밥나무가 조팝나무로, 이밥나무가 이팝나무로 소리가 거세진 음운변화 현상이다.
입하목은 아무래도 먹물식 작명인데다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쓰인 사례가 없어서, 아무래도 최근에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입하목, 육도목, 유소수 등을 <고전종합누리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학디지털아카이브>, <조선왕조실록> 등과 어원연구 기록이 많은 황윤석의 <이재난고> 등을 검색한 결과 한 건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밥먹듯이 시를 지으신 선인들의 한시 수 만편 속에, 저토록 눈부신 쌀밥나무를 보고 지은 한시 한 수가 없었을까?
풀솜대 꽃도 모양이 흰 쌀밥 같아서 이밥나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유사한 용례이고, 밥테기 꽃도 밥모양을 딴 우리말 이름이다. 배고픈 이들이 밥닮은 꽃을 보고 대리만족 한 것이리라.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 주변마을 지명이 쌀과 관련된 쌀미자 미동(米洞), 쌀을 되는 말두자 두동(斗洞), 10 말을 뜻하는 곡촌斛村 등인 것을 보아도 마을의 수호신 쌀밥나무에서 연유한 것을 알 수 있다.
민중의 하늘이던 밥, 농부의 피땀 범벅 '쌀'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는 명문을 남겼다. 백성의 밥을 챙기고 나누는 민생이야말로 정치의 시작과 끝이다. 불행히도 우리 역사를 읽다보면 굶어 죽는 민초들을 너무 자주 만나서 슬프다. 죽어라고 일한 농부들은 양식을 빼앗겨 배고파 죽고, 무능한 나쁜 지배자는 배터져 죽는 불공평한 세상에 분노를 일으킨다. 당나라 시인 이신(李紳, 772~846)은 "민농(憫農) 농민이 안쓰러워" 라는 시에서 이렇게 통탄했다.
"봄에 한 톨 씨를 뿌리면
가을에 많은 곡식 거두는 것을,
온 세상에 놀리는 땅 한 조각 없건만,
농부들은 도리어 굶어 죽고 있구나.
호미 들고 김매다 보니 벌써 한낮일세
땀방울은 벼포기아래 비오듯 쏟아지네
그 누가 알리오 밥상위 밥 한그릇
알알마다 쓰라린 고생 알갱이인것을"(번역 유기상)
이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게 수천년간 민초들의 소원이었다. 밥그릇 위로 소복하게 쌓아 올린 고봉밥은 보기만해도 배가 부른다. 고봉밥은 인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고봉밥 모양 봉우리를 노적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림 용춧골 노적봉, 선운사의 고봉밥 다섯 그릇 오봉, 특히 동운암에서 바라보는 고봉밥 노적봉이 일품이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그래서 기운 기(氣), 정신 정(精) 중요 한자에도 쌀미가 들어간다. 쌀밥이 백성들의 정신과 기운을 차리게 하는 하늘이었다.
홍익인간 정신의 '고봉밥'이 그리운 시절
쌀이 돈의 척도이던 가난한 시절, 없는 집안에서도 잡곡에 쌀 한 숟갈을 얹어 밥을 짓고 쌀밥 부분을 살짝 떠서 할아버지 밥상을 차렸다. 할아버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한 숟갈을 떠서 겸상하는 손주밥에 묻어 주었다. 가난해도 우리 조상들은 이토록 아름답게 정을 나누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회유하던 일본 관리들이 조선놈들은 돈으로도 안된다고 푸념했다 한다. 이제 황금종이 돈 앞에서 종교도, 권력도, 핏줄도, 도덕도 소용없는 시대가 되었다(조정래, 황금종이) 그 아까운 쌀이 음식물쓰레기로 버려지는 과잉소비의 시절이 되었다.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귀한 정신과 고봉밥의 둥근 마음을 상실해버린 오늘날 우리의 모난 사회다.
저 탐스런 이팝나무 꽃처럼, 우리 한국인의 자랑인 홍익인간 정신이, 노나메기 문화가, 원융회통의 포대기 포용정신이, 한국의 정신문화 등으로 잘 차려내는 홍익정신의 고봉밥으로 다시 피어나길 간절히 염원한다. 대산면 주요 가로수를 천연기념물 중산리 이팝나무와 연계하여 이팝나무로 선택한 일은 잘 한 일이다. 김완주 전주시장 시절 야심차게 추진한 200만 그루 나무심기의 결실로 전주시내 곳곳에 도시숲이 생긴다. 전주역앞 백제로 인도와 팔복동 산단 이팝나무 철길의 이팝나무 꽂길이 명소가 되고 있다.
전북대 교정의 환경녹화는 장명수 전총장의 공이다. 무단히 나무를 베는 자는 나쁜 골목대장이고, 나무를 심는 이가 진정한 지도자다. 고창의 신목인 경관자원 이팝나무와 역사문화 자원인 조선 최초의 여성소리꾼 진채선을 소재로 삼아, 내공있는 고창농악보전회에서 탄탄하게 기획한 '소리꽃 이팝'이란 국악극이 3년 연속 최고의 한옥 상설공연으로 호평이다. 지역대표 상설공연으로 자리를 잡아간다니 기쁜 일이다. 지역의 잠재자원인 자연 역사 예술 자원들을 고봉밥으로 잘 차려낸 덕분이리라.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