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과 오만의 정치

토요 시론

2024-04-13     박주현 기자

4·10 총선은 무수한 이변과 생물과도 같은 변화무쌍한 정치의 괴력을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야당의 기록적인 압승으로 끝났지만 선거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수많은 험난한 정치 여정이 또 다른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번 총선은 많은 변수와 변곡점들이 등장하고 작용했지만 그 중 윤석열 정권 2년의 불통과 오만의 실정이 가장 크게 작용했음을 총선 결과에서 보여줬다. ‘반윤’의 반사이익이 결과적으로 갈등 요인이 산재한 더불어민주당에게 표를 쓸어 담게 해 준 선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21대 국회는 ‘야대여소’의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국회로 점철됐다. 무엇보다 선거구 획정안이 국회에서 1년 넘도록 잠을 자다 선거 41일을 앞두고서야 정해졌다. 선거 37일·39일 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늦은 선거구 획정이었다. 그러나 선거일 전 1년까지 확정하도록 한 공직선거거법 제24조를 정치권이 스스로 위반해 놓고도 '가까스로 최악을 피했다고' 자조함으로써 ‘무능 국회’라는 오명을 막판까지 벗지 못했다. 

불통·오만 뒤범벅...지역 현안들 '속수무책' 

국회 본회의장 모습(자료사진)

게다가 선거구 획정안은 철저하게 당리당략에 따른 결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선거구가 선거 직전에 뒤바뀌면서 전북지역에서는 선택할 후보와 선거운동 대상의 유권자가 바뀌는 바람에 극도로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각종 민생법안과 지역 현안들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줄줄이 폐기됐다. 대표적으로 남원 공공의대 설립을 위한 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폐기돼 무기력한 지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수준을 드러냈다.

이런 와중에 국회에서 통과된 서민과 민생경제에 시급한 중요 법안들조차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에 막혀 국회로 되돌아와 재의결에 실패해 폐기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윤 대통령은 집권 2년간 9번의 거부권을 행사해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타협과 합의의 정치는 실종되고 무능과 오기, 불통과 오만이 뒤범벅인 정치 속에 지역 현안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 본 민심의 결과는 이번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에 큰 힘을 실어줬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 161석,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 14석으로 총 175석을 석권했다. 여기에 조국혁신당 12석과 진보당 1석, 새로운미래 1석을 합하면 범진보 진영 의석은 189석에 달한다. 국민의힘 탈당파가 주도하는 개혁신당이 얻은 3석까지 합치면 300석 중 192석을 ‘반윤’ 야당이 거머쥔 셈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지역구 90석, 비례정당인 국민의미래 18석으로 총 108석을 얻는데 그쳤다.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 저지선인 100석을 겨우 넘기며 ‘도로 영남당’으로 회귀했다. 반면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과반 이상 의석을 차지했지만 광주·전남, 전북의 호남 전 지역 의석을 싹쓸이해 ‘도로 민주당’으로 일당 독주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32년 만에 최고치인 총선 투표율 67.0%가 보여주듯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을 찾았지만 그들의 선택은 ‘반윤’, ‘정권심판’에 응징투표한 결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심은 거기까지였다. 대통령 탄핵과 개헌 저지선은 간신히 넘기게 해주었다. 다만 윤석열 정부 2년간 쌓이고 쌓인 유권자들의 절망과 분노가 컸음이 이번 총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 집권 후 이태원 참사와 새만금잼버리 사태 등에서 보여주었듯이 책임 정치는 실종된 대신 무능·무책임으로 일관한 게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거부권 남용, 입법권 무력화...정치 대신 ‘검찰통치’ 

3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에서 '미래산업과 문화로 힘차게 도약하는 전남'을 주제로 20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개최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게다가 여소야대 국회의 입법활동을 무력화시킨 대통령 거부권 행사는 역대 최고를 기록하며 많은 우려를 낳게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양곡관리법 개정안' 거부권부터 시작해 '간호법 제정안', '노동조합법 개정안', '한국교육방송공사법', '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김건희 여사 특검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까지 모두 9건에 이른다. 

역대 거부권 사례는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이 45회로 가장 많다. 이어 노태우 전 대통령은 7회, 노무현 전 대통령은 6회, 이명박 전 대통령은 1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회였으며,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따라서 1987년 민주화 이후로 한정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1년 8개월여 만에 9회 행사로 1위를 기록했다. 이로 인한 시행령 통치가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시켰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과의 논의·타협 노력은 보이지 않은 채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대통령은 이념의 대립과 좌우 갈라치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임기 초반부터 MBC 등과의 불편한 관계는 공식적인 기자회견이 사라지는 대신 방송사의 검열과 언론사·기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출국금지로 이어졌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는 퇴보했다. 대신 검찰통치가 정치를 대신했다. 특히 검찰·감사원 등 권력기관은 정권의 호위무사로 전락해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입틀막’으로 무능·무책임·불통의 국정 운영을 보여줬다. 이런 결과가 결국 이번 총선의 민심으로 귀결됐다. 

외신들도 이번 총선의 결과가 던진 민심의 의미를 윤 정부의 불통과 오만에 있음을 지적했다. 대표적 사례로 영국 공영방송 BBC는 이번 한국의 총선 결과를 두고 “한국 헌정사에서 집권당이 집권 기간 중 단 한 번도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며 “윤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통치 방식과 김건희 여사 문제 등 총체적인 정권에 대한 비판이 이번 선거에 반영됐다”고 진단했다. 방송은 특히 "윤 대통령은 대립적인 정치 스타일 때문에 유권자들을 떠나게 했다"며 "이전에 정치 경험이 없는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은 때때로 정치인보다는 검사처럼 행동했다"고 따갑게 비판했다. 

야권 압승, 가장 기여한 사람은? 

제22대 총선에서 승리한 전북지역 10개 선거구 민주당 당선자들은 11일 전북특자도의회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압도적 지지를 보내준 도민들께 감사의 뜻을 표했다.

방송은 또 "비록 국회가 분열된 것은 한국에서 흔한 일이지만 윤 대통령은 타협을 위해 야당의 지도자와 단 한 번도 마주 앉지 않았다"며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거부권에 의존해 왔다"고 꼬집었다. 방송은 "간단히 말해 윤 대통령은 그의 충실한 보수 지지 기반을 넘어서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며 ”결과적으로 여당은 의회 통제권을 얻는데 실패했고, 이것은 그가 법안 통과를 비롯해 경제 둔화 및 엄청나게 상승한 집값, 급격한 노령 인구 증가와 같은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윤 대통령은 그동안 본인의 지지층이 매우 탄탄한 것처럼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범죄자를 상대하지 않겠다면서 야당 대표를 만나주지도 않고 국회와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국회에서 보낸 법안을 연달아 거부했고, 청문회 결과를 무시하며 인사를 강행했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으로 윤 대통령이 꼽히는 이유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지난 21대에 이어 22대에서도 절대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175석을 얻는 ‘대승’을 거둔 민주당도 선거 초반부터 공천 갈등과 마찰이 폭발해 일부 의원들의 탈당과 창당 사태로 이어져 분열의 후폭풍과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반윤’의 반사이익에 힘입어 ‘친명(이재명)’계 인사들이 절반 가까이 당선되면서 ‘친명 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이른바 ‘친명횡재 비명횡사’로 불리는 공천 과정에서 비명계 현역 의원들이 대거 사라졌고 이 자리를 친명계 인사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당대회를 비롯해 각종 의정활동에서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변호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정부·여당을 상대로 적극 ‘총대’를 멜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당은 21대 국회에 이어 이번 국회에서도 이 대표의 사법적 리스크가 가장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는 게 정치권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선거법 위반·대장동 의혹 등으로 재판에 시달리고 있는 이 대표를 방어할 ‘사법리스크 대응 군단’이 한층 강화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치 잘하고 유능해서 표 몰아주었다고 생각하면 '착각·오만' 

국회의원 배지(자료사진)

민생 현안을 더욱 챙기고 정권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한층 강화해 달라는 엄중한 총선 민심에도 불구하고 자칫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 때문에 전력을 엉뚱한 방향으로 소모하거나 이로 인한 내부 갈등과 무기력·무능이 다시 표면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총선에서 지난해 9월 이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을 이끌어 낸 ‘대장동 변호사’가 대거 당선됐고 정부 여당과 언론, 당내 비명계의 비판을 차단할 '강성 스피커'들이 많이 합류돼 대외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고 하지만 '이재명을 위한 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걱정이 안팎에서 흘러 나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지역에서도 친이명계에 줄서며 무기력한 의정활동을 보여왔던 국회의원들이 4년 내내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반윤’과 ‘정권심판론’이 가져다준 ‘민주당 순풍’에 힘입어 쉽게 당선된 의원들이 적지 않다. 의정활동을 잘했고 유능했기 때문에 민심이 당연히 자신들을 지지해 준 것으로 착각한다면 또 4년 내내 무능하고 무기력한 정치와 의정활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민심은 단지 최선 아닌 차선, 최악 대신 차악이라도 선택했을 뿐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정활동을 잘하고 정치적으로 유능해서 표를 몰아주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자 오만이다. 착각과 오만의 정치는 대통령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