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에 관심 두지 않는 희한한 선거...누가 심판자인가?

토요 칼럼

2024-04-06     박주현 기자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

18세기 사회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남긴 말이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통용된다고 일부 학자들은 선거철만 되면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이번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 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특히 특정당의 독주가 오랫동안 지속돼 온 지역일수록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인 선거기간 내내 국민 대신 정당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유권자들은 설 땅이 없다. ‘정당 공천’이란 특이한 제도를 통해 본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거대 정당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후보자들을 모두 심판하여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선거의 본질을 흐려놓고 말았다. 

전북지역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공천이 선거 초반 가장 큰 이벤트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 때문에 지역 언론들도 온통 더불어민주당 일색의 선거 보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같은 당 후보들끼리 유권자보다 정당을 향해 눈치 보고 줄서기 하며 치열한 공약 대결을 펼친 것은 잠시 뿐, 정당의 공천 마지막 과정인 경선이 종료된 이후에는 그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본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후보들은 이미 선거가 끝난 듯 경선이 끝나자 자만하며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정당 항아리'에 갇힌 유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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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정당 후보자들이 바라본 유권자들 모습은 마치 정당의 항아리에 갇힌 물고기처럼 보인다는 우스개가 정치권에서 흘러나올 정도다. 이 때문인지 특정 정당의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희한한 논리가 통용되는 지역에서 해당 정당 후보들은 유권자 대신 오히려 당 지도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지난 몇 개월 내내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각 정당들은 유권자들이 바라는 세상이 아닌 그들이 바라고 그들이 만들고 싶은 세상을 꿈꾸며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심판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유권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정권 심판론’, ‘야당 심판론’, ‘검찰공화국 심판론’에 이어 심지어 ‘전 정부 심판론’으로 진영이 나뉜 정당들은 총선이 아닌 대선을 치르는 듯하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바로 지역의 현안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심판론의 중심에 선 정치인과 주변 인물들을 단죄할 것처럼 잔뜩 벼르며 낯뜨거운 설전을 연일 벌이고 있다. 적대적 대결주의와 혐오적 표현들, 소모적 논쟁과 토론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거친 막말 등을 일삼는 정당과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을 주인 또는 심판자가 아닌 관중이나 노예로 여기며 ‘묻지마 지지’를 호소하는 양태다.

정당이나 후보자의 정책을 기반으로 투표를 결정하는 정책선거는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유지되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은 지역의 정책이나 공약은 찾아보기 힘들고 저마다 총선에서 승리하면 심판자가 되겠노라며 표를 구걸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희한한 선거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겉으론 강조하면서도 선거가 본격 시작되기도 전부터 불공정 공천 논란에 더해 ‘공천=사천’이란 표현이 등장할 정도의 극심한 갈등과 분열로 유권자들에게 정치 혐오와 냉소를 잔뜩 안겨주었다.

국가와 지역을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개인과 정당에 충성할 인물을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낳았다. 기존의 정당 구조를 더 약화시키고 소수 정당들의 특정당 의존성을 키워 정치 양극화와 양당 독점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총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민주주의 보루인 의회정치가 제대로 작동할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이유다.

지역 정책 공약 실종...오로지 '심판 선거'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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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번 총선의 특징은 지역의 현안에 관한 정책 공약의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간 국정운영의 실태를 고려하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부의 평가와 심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과정에서 지역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깊은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전북의 경우만 해도 지난해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실패 이후 이중 삼중의 소외와 고통을 이어가는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정책과 공약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높다. 심지어 후보자 토론회 불참은 다반사이며 지역 현안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후보들도 있다. 화려한 정당 옷을 입고 선거운동을 하는 일부 후보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일꾼을 꿈꾸는 게 아니라 정당의 일꾼, 정당을 위한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할 정도다.

특히 오랜 기간 전북지역 정치를 독점해 온 정당은 손쉬운 선거 승리를 예상하면서 특별한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은 데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선거에 임하는 정당과 후보자들이 이렇게까지 지역과 유권자들에게 성의가 없이 오로지 '심판 선거'에 열중하는 모습은 근래에 찾아보기 힘들다. 2030세대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그런데 전북지역 국회의원 출마자들 가운데 2030세대는 단 1명 뿐이다. 여성 후보도 전체 후보 33명 중 고작 2명 뿐이다. 당연히 2030세대를 위한 정책 공약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전북여성단체연합이 전북지역 총선 후보들에게 젠더 정책과 관련한 공개 질의를 한 결과 후보 6명만이 답변에 응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단체는 거대 양당인 국민의힘 후보 10명 전원과 민주당 후보 대부분이 답변에 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젠더 정책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했다. 지역의 보건의료와 미디어 정책에 관한 질의에도 정당과 후보자들은 무성의하거나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밝힘으로써 정치에 대한 환멸·혐오·무관심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역 사회는 물론 한국 정치의 미래에 대한 경고 신호가 아닐 수 없다. 미래 세대 중추인 2030세대 유권자 상당수가 “뽑을 정당이 없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이니 정당들이 결국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권리를 포기하게 한 셈이다.

초특권에 방탄·불량, 그들만의 정치...언제까지 보아 넘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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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위기가 날로 심각한 지역은 물론 미래 세대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책 개발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진흙탕 싸움의 네거티브 선거전과 막말, 지역 후보자 토론회가 거대 정치 담론 토론장으로 변질돼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며 자질 미달 후보들을 여과 없이 중계하는 후보자 TV토론회 등은 공정 의식이 강한 청년 유권자들의 등을 더욱 돌리게 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선거기간 내내 보아왔던 이전투구를 선거가 끝나면 국회에서 벌이는 똑같은 모습을 또 바라보며 정치 혐오에 더욱 빠지게 될 차례다. 이번 총선 과정을 바라보며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는 푸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정당의 각성 요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유권자인 국민도 이젠 더 이상 ‘불량 정치’, ‘특권 정치’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말로만 '정치 개혁'을 외칠 것이 아니라 실천에 나서는 것이 진정한 유권자의 권리를 찾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된다고 한다. 특히 연봉만 해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 5,500여만원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1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의원실도 2명이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인상적인 대목은 스웨덴 국회의원들은 출퇴근에 대중교통이나 자건거를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 임금만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데도 언제까지 우리는 초특권에 방탄과 불량, 그들만의 정치를 덤으로 보아 넘길 것인가.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