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이야기(3)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탄소발자국을 덜 남기려고 우리 회사 책도 1년에 한 번만 배송받기 때문에 책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는 수가 많아요. 고맙게도 모 선배께서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제법 예쁘게 잘 나온 것 같네요. 이제 우리의 주인공 빅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죠?
빅터 이야기(3)
오전 8시 7분, 빅터는 아파트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주저앉는다. 피곤하고 우울한 표정이다. 지금 막 도시위생국에서 일을 마치고 교대한 참이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코는 하도 풀어서 빨갛다. 갑자기 아파트에 불이 들어오며 비서 로봇 힐다(Hilda)가 문가로 나와 그를 맞는다. 이미 빅터의 차를 알아보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오셨어요?” 목소리는 거의 사람처럼 반기는 기색이 뚜렷하다. 165센티미터인 로봇은 매끈한 여성 휴머노이드의 체형을 지녔다. 힐다는 다양한 감정도 표현하지만, 빅터가 그녀를 고른 까닭은 아직도 약간 마네킹 같은 외모 때문이었다. 인터넷에는 훨씬 인간화된 모델도 많다. 하지만 막상 그런 모델을 보면 그는 오싹했다. 너무 인간을 닮은 로봇은 왠지 시체나 좀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로봇에게 뭐랄까, 다소 건강하지 못한 애착을 갖는 친구도 몇몇 있었다.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힐다는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전자제품일 뿐이란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진실을 끊임없이 알리는 존재. 빅터는 생각했다.
빅터는 한마디도 않고 외투를 벗어 힐다의 팔에 내던지듯 건넸다. 그녀는 문간에 있는 옷장을 열고 외투를 걸었다. 움직임은 자연스러웠지만 바닥에 뭔가 놓여 있을 때 밟지 않으려는 동작은 다소 과장된 편이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녀는 옷을 걸으며 물었다.
“하루가 아니라 밤이지.” 빅터는 질문을 바로잡았다. “끔찍했어. 집엔 별일 없었나?”
“시스템을 모두 점검했어요. 모든 파라미터가 만족스럽고, 네트워크 시그널도 강하게 잡혀요. 부엌을 청소하면서 쓰레기를 500그램 정도 압축했어요. 아무 문제없었어요. 하지만 골디(Goldie)가…” 빅터가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힐다는 말을 멈추더니 급히 티슈를 두 장 뽑아 건넨다. 그는 티슈를 받아 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큰 소리로 코를 푼다. 코 푼 휴지를 힐다에게 건네자 그녀는 위생적으로 처리한다.
“호흡기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군요.”
“죽을 것 같아.”
빅터는 웅얼거린다.
“활력징후를 체크해보니 코감기에 걸리신 것 같네요.” ‘ㄹ’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 것이 몹시 신경에 거슬린다. “코감기로 죽을 확률은 0.0001입니다.”
“나도 알아, 이 깡통 같은 녀석아. 비유법도 못 알아듣다니!”
“‘깡통 같은 녀석’이란 말씀은 제가 어딘지 고장났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제조사 AS 팀에 연락해볼까요?”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그는 침실로 들어가더니 속옷에 티셔츠만 걸친 모습으로 나온다. 이런 버릇 때문에도 너무 진짜 같지 않은 로봇을 골랐을지 모른다. 약간 특이하다면 특이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고 있을 때 너무 진짜 같은 뭔가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본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이 너무 덥군, 힐다. 온도를 좀 낮추라고.”
“실내 온도를 3도 낮췄습니다. 스캔해보니 체온이 37.8도네요. 그래서 덥게 느껴지시나 봐요. 그건 그렇고, 기분은 어떠세요?”
“끔찍하지. 좋을 리 없잖아.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찬 기분인 데다 해머로 얻어맞은 것 같다고.”
“머리를 스캔해보니 둔탁한 걸로 얻어맞은 외상은 전혀 없고, 수분 공급 상태도 모든 항목이 정상입니다.”
“거참 고맙군 그래!”
“별말씀을요. 닭고기 스프 같은 거라도 좀 드릴까요?”
“됐어. 의사를 만나야 돼. 뇌수막염 같은 건지도 몰라. 전화 걸어서 예약을 잡아줘. 지금 당장!”
“머리를 스캔해본 결과 수막에 염증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 됐어. 머리가 아파 미치겠다고.” 빅터는 이마를 문지른다.
“활력징후를 체크한 결과 상기도에 바이러스 감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점막이 붓고, 맑은 콧물이 나오고, 전신적으로 나른한 게 특징이죠. 3~5일 정도면 좋아질 겁니다.” 빅터가 다시 재채기를 하기도 전에 힐다는 티슈 두 장을 건넨다.
“에취! 감기라고? 말도 안돼. 이런 게 그냥 감기일 리 없지! 핑커튼 박사에게 전화해서 제일 빠른 날짜로 예약을 잡아줘. 간호사에게 직접 만나서 진료받고 싶다고 해. 아주 급하다고!”
“이미 주인님의 증상과 활력징후를 핑커튼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병원에서는 충혈제거제와 진통제를 드시고,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쉬라는데요. 약을 갖다 드릴게요.”
“충혈제거제라고? 이런 젠장! 뇌출혈이라도 생긴 것 같다고!” 그는 또 코를 푼다.
“머리를 스캔해본 결과…”
“아, 됐다니까. 이건 그런 게 아냐! 사람하고 얘기를 해봐야겠어.” 빅터는 문득 일레인에게 이런 투로 말을 했다면 집에서 쫒겨나 싸구려 여관에서 자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자제할 수가 없었다. 온갖 변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는 것, 그것이 오히려 짜증스러웠다. 왜 이 녀석은 항상 옳은가? 아니, 왜 항상 이토록 정확한가? 힐다는 항상 정확했다. 하지만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높고 활기찬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빅터의 로봇 애완견이다. 작고 털이 복슬복슬한 포메라니안이 자연스럽게 곁으로 다가와 재롱을 부렸다. “쓰다듬어 주실래요?”
“조금 있다가, 골디(Goldie).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멍! 멍! 알았어요.” 골디는 실망한 표정으로 “침대”, 그러니까 충전 크래들로 돌아가 충전 모드에 들어갔다.
“힐다, 핑커튼 박사의 간호사를 연결해줘.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고 했잖아.”
힐다의 가슴에 있는 터치 스크린에 간호사의 얼굴이 나타난다. “수아레즈(Suarez) 씨, 저는 10분 전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충혈제거제와 진통제를 드시고,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쉬시라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가정 도우미가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요.”
“뭐라고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그는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쿠션을 집어 황급히 팬티를 가렸다. 그리고 누가 빼앗기라도 할 듯 꼭 붙잡았다. “남의 사생활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거요?” 분노와 당혹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닷새 내로 호전되지 않으면 가정 도우미에게 다시 연락하라고 하세요.” 간호사의 말투가 약간 퉁명스러워진다. “그리고 선생님의 몸에서 제가 보지 못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요, 수아레즈 씨.”
“잠깐만… 이건 그냥 감기가 아니에요. 뭔가 훨씬 더 심각한 병이라고!”
“활력징후를 보면 체온이 약간 높을 뿐입니다. 해열진통제를 드시면 좋아질 겁니다. 그럼 안녕히.”
힐다의 터치 스크린이 즉시 홈 화면으로 돌아간다.
“잠깐 기다려요. 이런 염병할!”
골디가 벌떡 일어나더니 공을 물고 와 발치에 떨어뜨린다. “멍! 멍! 공을 던져주세요!”
“좀 기다리라고 했잖아, 골디! 네 침대로 가!” 골디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로 돌아간다. 힐다가 알약 세 알과 물컵을 건넨다. 어느새 부엌에서 챙겨온 모양이다. 빅터는 알약을 삼킨 뒤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는다.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