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 지나면 봄은 꼭 오고야 만다
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18)
가장 눈이 많고 밤이 길다는 대설과 동지 철인데도 철없는 봄꽃이 피고 겨울에 비만 내린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와 코로나 대유행은 인류가 탐욕적 소비생활을 어서 멈추고 지구촌 천지인 상생의 근본으로 되돌아가라는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세계 최저 출산율로 한국 소멸 위기 비상경보가 울리는데도, 내 자식만 살리고 남의 자식 죽이기에 혈안인 정치권의 파렴치를 보는 국민들 속이 터지는 우울한 대한민국 동지무렵 풍경이다.
동지는 음을 상징하는 밤이 가장 길고 추운 때라 살기 힘든 때다. 이 절망의 순간에도, 암흑을 뚫고 쥐구멍에도 한줄기 빛이 든다. 이 우주변화를 형상화 한 주역의 괘가, 우뢰가 땅속에 숨어있는 지뢰복(地雷復)괘다. 암흑기에도 빛과 희망이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광복절의 광복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새해 출발점, 천문학적 설날이다. 동짓달을 지뢰복괘 복자를 따서 복월, 지지의 시작 첫글자를 따서 자월(子月)이라 하는 이유다. 고창 고인돌천문대의 춘추분, 하지, 동지 일출 방향 중에서 경주의 신라 천문대가, 오로지 동지 일출방향으로만 놓인 까닭이다. 동지와 3일차이인 성탄절도 서구권의 동지설날 축제의 변형이다. 동지가 까치설, 작은 설이라 불려왔고, 동지 팥죽을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동지가 실질적 설이라는 뜻이다.
동학농민군 부적이 '선운사 비기'라면 불원복 태극기는 '항일의병의 부적'
우리 선인들은 우주변화의 원리에 순응하여 살면서도, 극한 상황에서도 늘 희망을 보고 자기를 연마하는 삶을 살아왔다. 우리와 같은 천지인 상생 우주관을 지닌 인디언들이 동짓달을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닌 달"로 보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의 종시, 시종, 끝이 바로 시작이란 우주관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의병, 독립투사의 사상적 신념이 바로 지뢰복 괘의 불원복(不遠復 곧 빛이 회복된다)이라는 신념이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제의 기관총 사격에 맞서 진격할 용기를 준 부적이 선운사 마애불 비기였다면, 항일의병의 광복 신념 부적이 바로 불원복 태극기였다. 유학자들이 거울로 삼는 주자학의 종주 주자(朱子,朱熹)가 평생 허리 춤에 차고 다니며 경계로 삼은 부적이 바로 이 불원복이다. 그런 연유로 불원복을 주자의 3자부(三字符)라고도 한다.
일제의 강점으로 박탈된 국권이 머지않아 반드시 회복된다는 예언이 지뢰복괘의 첫 효에 "불원복" 으로 새겨져 있다. 충효의리의 실천과 광복의 신념을 가슴속에 새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항일 독립투쟁에 바친 의병, 독립군, 광복군, 의사, 열사, 무명전사들이 줄지어 일어나 싸워서 마침내 빛을 되찾았다. 광복의 염원을 태극기에 수 놓은 등록 문화재 태극기가 이른바 불원복 태극기다.
이육사 시인과 퇴계 후손 치암 고택 '불원재'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이며 독립유공자인 진성 이씨 이원록, 우리에게는 수인번호로 지은 예명 이육사 시인, 청포도, 광야, 절정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항일투쟁기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퇴계 11대 손인 치암 이만현은 경술국치를 당하고, 바위를 보기에도 부끄럽다 하여 호를 치암(恥巖)으로 바꾸고 비분강개하다 생을 마감했다. 고창의 호남의병 최초순국자 일광 정시해 의사가 나라 잃은 선비가 미치지 않을 수 있냐고 일광(一狂)으로 호를 쓰고 의병에 나선 것도 같은 기개다.
이육사 시인의 외가와 처가도 모두 항일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집안이다. 이육사 시인의 부인 순흥 안씨 안일양(安一陽) 여사의 이름도 바로 불원복의 다른 표현이다. 6효 중 양이 1이고 음이 5인 것이 지뢰복괘의 모양인데, 1양5음 중에서 1양을 따온 것이다. 비록 희미한 빛이지만 우리가 지성으로 노력한다면 광복은 꼭 온다는 신념을 딸의 이름에도 꼭꼭 새긴 집안이다. 이육사와 안일양 부부의 이름 속세도 광복염원의 기도가 어려있다. 부창부수라던가. 문화재로 지정된 안동의 치암 고택을 수호하며 사는 주역전공 철학박사 이동수 전 안동문화원장은 불원재라는 당호를 걸어 두고, 선조들의 고귀한 뜻을 계승하며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 광복·지구촌 광복을 위하여 어서 '근본'으로 돌아가자
동지는 잃은 길을 뒤돌아 보고, 늦기 전에 다시 근본을 회복해야 후회가 없다는 전환점이다. 새 희망, 새 나라, 새로운 사상으로 사람의 근본인 아름다운 마음 밭을 되찾자는 불윈복을 기원하는 때이다. 호남 3대 실학자인 이재 황윤석의 이재난고를 검색해보니, 춘추분, 하지 등이 20여회 정도 나타나는 반면에, 동지는 무려 194회나 나온다. 동지를 그만큼 중요한 절기로 인식했고, 공적 사적으로 동지 관련 기사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옛 서당의 입학식을 동짓날 했고, 중국에 정기적 우호 사절단인 동지사를 동지에 보낸 것도 새해 맞이 의식이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판이 요동친다. 정치 지도자, 가진 자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본성도 회복하고, 나라의 근본을 살피는 계기가 되길 갈망한다. 지구촌 최저 출생률로 국가 소멸위기인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서, 국정 과제와 민생의 근본을 살피는 정치로 되돌아가길 염원한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함께 잘 살도록 상생의 나눔 문화를 생활화하는 운동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지구촌이 함께 공생할 수 있도록 지구를 살리는 공생의 생활 습관을 회복하도록 염원하는 동지 설날이면 참 좋겠다.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