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연장과 생물학적 강화 혜택, 문제는?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빅터 이야기(2)

2020-08-04     강병철 객원기자

아직 인터넷 서점에 제대로 등록도 되지 않았는데 주말 사이에 몇 건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한 가지 알아두실 것이 있어요. 이 책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서입니다. 한 호흡에 다 읽기는 어렵지요. 제가 읽기 편하게 한 꼭지씩 끊어 놓았어요. 거기서 멈춰 숨을 고르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가만히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 빅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까요?

빅터 이야기(2)

마침내 일레인에게 그날이 찾아왔다. 갑자기 아랫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생기더니 늘 피곤하다고 했다.

빅터는 빨리 의사에게 가보라고 재촉했지만 그때마다 짜증을 내며 “그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체중이 불안할 정도로 줄고, 한시도 졸리지 않은 때가 없는 것 같았다.

빅터가 몇 개월을 닦달한 끝에 마침내 그녀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몇 가지 검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결과가 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4기 난소암이었다. 이미 복강은 물론 폐와 뇌까지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수술은 불가능했다. 다른 치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종양 전문의는 완치를 장담했다. 특수 제작된 나노입자를 주입하면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모든 암세포를 찾아내 없애버린다는 것이었다. 빅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내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살 만큼 살았어요. 집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고 싶어요. 당신이 원하면 호스피스에 가도 좋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평화롭게 죽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일레인의 죽음은 빅터가 250년을 살며 겪었던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몇 가지 완화요법만 받다가 3개월 만에 자녀와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빅터의 마음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일레인과 함께 했던 마지막 몇 달간 그는 슬픔과 함께 아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심경이 복잡했다.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구한 나노기술을 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60년간 함께 행복했다. 아내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비로소 죽고 싶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 심지어 자신의 인공심장을 저주했다. 그 몹쓸 물건이 일레인 없는 삶을 오래 이어가라는 ‘천형을 내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겠다는 맹세를 저버린 데 대해 쓰디쓴 후회를 했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두었더라면 영혼의 짝을 잃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디는 고통도 없을 것 아닌가.

재혼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녀와 손주들에게 쏟았다. 이때 다시 큰 문제가 닥쳤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망막에서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손상되는 병이었다. 이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거나, 차를 몰거나, 심지어 영화를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마침내 시력을 회복시켜줄 마이크로칩을 이식받기로 결심했다.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뿐이었다. 마이크로칩은 기적이었다. 빅터는 20대의 시력을 되찾았다.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다시 사물을 보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는 스쳐지나는 삶을 그저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20년 전에 은퇴했지만 다시 직업을 갖고 일을 시작한다면 삶의 중심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회복된 시력으로 들여다본 거울 속에는 추레하게 늙은 남자가 서 있었다. 심지어 새로운 배우자를 맞으면 어떨까도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에 있는 저 쭈글쭈글하고 구부정한 영감탱이에게 어떤 고용주가, 그리고 어떤 여성이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마침 새로운 항노화요법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나게 ‘스마트한’ 치료였다. 선전을 들으면 공상과학소설 같았다. 의사들이 개발한 나노입자를 몸속에 주입하면 모든 세포 속에 들어가 노화 관련 DNA의 문제를 빠짐없이 ‘교정’한다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모든 노화 징후를 없애준다고 했다.

시술 전후 사진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일레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 평화롭게 죽겠다고 맹세한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맹세는 인공심장을 이식받은 그날 무효가 되지 않았던가? 앞으로 몇 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몸속은 물론 외모 또한 젊고 활력있게 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100년이 지난 지금, 빅터는 자신을 젊고 건강하며 생산적으로 만들어준 다양한 첨단기술에 다시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는 로봇이다. 로봇이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해결해 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레인이 그립고 진정한 관계를 열망한다.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토록 오래 사는 데 대해 때때로 죄책감을 느낀다. 모든 사람이 수명 연장과 생물학적 강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하지만 그는 심각한 사고를 당해도 인공 신체부위 덕에 거의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다. 죽기를 원한다고 해도 생명유지 장치를 꺼줄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살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정기적 회춘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생체공학적 이식물들이 서서히 고장 나기를 기다려 비참한 노화와 죽음을 맞는 것이다. 죽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고비를 겪을 때마다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 헤쳐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이 하나의 덫처럼 느껴진다.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의학과 문화, 철학 등에 관한 강병철 선생의 해박하고 통렬한 글을 고정적으로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