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빅터 이야기(1)

2020-08-03     강병철 객원기자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책 표지

캐나다는 존엄사를 허용하는 나라다. 즐겁게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구차하게 질질 끌지 않고 록키 산맥의 어느 호숫가를 찾아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의 첫 부분을 읽고 그게 얼마나 천진한 생각인지 실감했다. 안 팔릴 줄 알면서 번역 출간을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빅터 이야기(1)

그들은 대학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인공적’ 생의학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살다가 늙고 죽을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수십 년간 그들은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명분에 헌신하며 결속을 다졌고, 두 자녀에게도 그런 가치를 가르쳤다.

어느 날 빅터는 예기치 않게 심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은 그의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와 일레인은 심장병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자연적 방법을 동원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심장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만 먹었으며, 콜레스테롤 저하제를 복용했다. 하지만 한번 손상된 심장은 점점 나빠질 뿐이었다. 65세가 되자 말기 심부전 단계로 접어들었다.

심장이 점점 커지면서 날로 약해졌다. 그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항상 어지럽고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발과 다리가 어찌나 부었던지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조금 더 지나자 누워 잘 수도 없었다. 폐에 물이 차 바로 누우면 금방이라도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아픈 데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삶이 비참할 정도였다. 다행히 일레인은 건강이 훨씬 좋았으며,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펴주었다.

점차 빅터는 자신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앓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그와 일레인은 평생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고, 이제 막 첫 손주를 본 터였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랑과 기대에 마음이 부푸는 것은 평생 겪어본 어떤 감정보다도 강렬했다.

얼마 안 있어 곧 둘째 손주가 태어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그는 절박했다. 살고 싶었다. 조금 더 살아서 그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함께 놀아주고 싶었다. 그는 상황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인공심장을 이식받아 심장병을 완치한 사람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너무 오래 살지는 않겠노라 평생 생각했지만, 점점 많은 사람이 혁신적인 수명연장술을 받아들여 젊었을 때보다 더 건강하고 활력있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도 심박동조율기나 이식형 제세동기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병이 그토록 빨리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심장전문의는 기능을 잃은 심장을 버리지 않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머지않아 방법이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둘째 손주가 태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살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심장전문의는 인공심장을 거부하는 빅터의 고집이 몹시 못마땅했다. 이미 인공심장이 생체심장 이식술을 완전히 대체한 뒤였다. 인공심장은 생체심장보다 훨씬 쉽게 구할 수 있고, 거부반응도 없으며, 내구성 또한 훨씬 뛰어났다. 최초에 이식된 심장도 80년 넘게 아무런 문제없이 작동하는 데다, 기술은 계속 발전했다. 그래도 빅터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심장을 제거하고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된 전자장비를 이식한다는 생각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일레인을 깨웠다. 흉통이 심해 숨을 쉴 수 없었다. 일레인은 즉시 구급차를 불렀지만 그 사이에 빅터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다음 기억은 응급실이었다.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요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제세동기로 수차례 충격을 가한 끝에 그를 소생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심장이 심하게 덜그럭거리는 것을 느끼며 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아내와 아들과 딸을 보았다. 모두 너무 울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심장전문의가 뭐라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긴박한 어조 속에서 ‘말기’와 ‘수술’이라는 단어만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그는 이제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의 얼굴에 집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침대 위로 몸을 기울인 자녀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말이 아니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이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는 영구적 인공심장 이식술에 동의했다. 일레인이 빅터를 대신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는 동안 마취전문의는 서둘러 마취제를 정맥주사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수술 후 빅터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갑자기 활력이 넘치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제서야 그간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깨달았다. 폐를 물로 가득 채우고 사지를 퉁퉁 붓게 만들었던 부종은 씻은 듯 사라졌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죽어야 한다는 오랜 신념은 터무니없이 고집스럽고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일레인은 남편이 살아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감사하면서도, 극단적인 조치를 거부하고 노화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아내도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면 마음을 바꿀 거라 믿었다. 스스로도 신경이식 같은 치료는 단호히 거부하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사람들은 신경이식술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노화에 의한 기억력 장애는 물론 알츠하이머병까지 기적적으로 완치시킨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낼 시간이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넷으로 불어난 손주들은 곧 10대로 접어들 것이었다.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녀석들이 금방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빅터는 문득 자신이 일레인보다 훨씬 활력에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아내는 몇 가지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건강상 위기를 맞아 ‘경고 메시지’를 받으면 그녀 또한 경이로운 의학기술의 힘을 빌려 젊음을 되찾고 수명을 크게 늘릴 것이었다.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의학과 문화, 철학 등에 관한 강병철 선생의 해박하고 통렬한 글을 고정적으로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