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의 책상 –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백승종의 서평

2023-11-03     백승종 객원논설위원
'서양사학사-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책 표지(탐구당 출판)

출간된 지가 제법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고전적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책이 있다. 영국 역사가 콜링우드가 쓴 <<서양사학사(The Idea of History)>>도 그런 책이다. 대학 초년생 때 나는 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뜻인지 잘 몰라서 애를 먹었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저자의 뜻이 명확히 드러난다.  

모방의 역행 

그 책에서 어제 나의 눈에 띤 한 구절을 발췌하여 아래에 적어둔다.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보라. 그러면 문맥 사이에 독특한 향기가 느껴질 것이다. 콜링우드는 내가 지금 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1946년에 이미 75년쯤 뒤의 내 모습을 모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방의 역행이라고 해 두자.

“역사가의 자율성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은 역사적 비판이다. 베이컨의 비유를 빌려본다. 자연과학이 자연을 심문하여, 의문에 대한 대답을 꺼내도록 실험하는 것과도 같고, 또는 무엇인가를 못살게 굴어서 그것을 이해하는데 합당한 방법을 찾아내듯이 말이다. 역사가도 전거를 증언대에 올려놓고, 그것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몰라서 그렇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답이 감춰져 있는 자료를 다룬다. 역사가는 반대심문으로하든지, 억지로 끌어내든지 제한된 자료로부터 역사해석의 적합한 방법을 찾아낸다.

만약 어느 지휘관이 속보를 보내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더라도, 역사가는 비판적으로 그것을 읽는다. 그리고 물어본다. ‘이것이 승리였다면 장군은 왜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더 진격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보고서를 보낸 장군이 숨기고 있는 모종의 진실을 찾아내어 그를 추궁할 것이다. 혹은 그런 식의 비판적 문서 해석의 방법을 통해서 바로 그 속보에 기록된 대로 전투 광경을 묘사한 앞선 시대의 역사가들, 비판적이지 않은 자신의 선배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꾸짖는다.”(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역, 탐구당, 개정 초판, 2017. 글이 뜻이 통하도록 번역된 문장을 내가 마음대로 고쳤음을 적어둔다.) 

글이란 아는만큼만 보이는 요물(妖物) 

일상에서 내가 하는 일은 이미 1946년에 콜링우드가 서술한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작업이다. 20대 초반에는 콜링우드의 이 글을 읽고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때는 번역된 문장에 가로막혀 어리벙벙하기만 하였다. 다음은 그때 읽은 번역문을 그대로 옮긴다.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가의 자율성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은 역사적 비판이다. 베이컨의 비유를 빌리자면 자연과학이 자연을 심문하여 물음에 대한 대답을 꺼내도록 실험함으로써, 고문하여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듯이, 역사도 전거를 증언대에 올려놓고, 그것이 하고 싶지 않아서든 갖고 있지 않아서든 감춰져 있던 자료를 반대심문으로 억지로 끌어냄으로써 적합한 방법을 찾아낸다. 어느 지휘관의 속보에서 승리를 주장하더라도 역사가는 비판적으로 그것을 읽고 ‘승리라면 왜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나아가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하여, 필자가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을 탓하게 된다. 혹은 동일한 방법으로, 그 동일한 속보 전투묘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비판적이지 않은 선인의 무지를 탓하게 된다.”

결국에, 글이란 아는만큼만 보이는 요물(妖物)인 것이다. 요귀를 잡으려면 적어도 그 이상으로 내가 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열심히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천품이 부족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