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샘물과 불치의 한국병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3-10-13     백승종 객원논설위원
백승종 역사학자

정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나쁠수록, 우리는 더더욱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해법을 발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북유럽의 복지사회를 배우자고 말한다. 옳은 주장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과거를 향해 던지는 일도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증오하는 조선 사회야말로 그렇게 나쁜 세상만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인간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왕조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질서와 안정에 있었다. 내가 아는 어느 서양학자는, 조선 사람들을 '조직의 명수'라고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조직의 순기능

조선에는 정말 다양한 계회(契會)가 존재했다. 집안에는 족계(族契)가 있었고, 마을에는 동약(洞約) 또는 향약이 있었다. 같은 관청에서 근무한 관리들끼리도 마음이 통하면 계를 맺었다. 똑같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도 계를 맺어 서로를 돌보았다. 또, 배움을 함께 한 사람들끼리는 동문(同門) 또는 문생(門生)이 되어, 대대로 특별한 유대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조선의 사회조직이 순기능만 발휘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지연, 혈연, 학연의 끈끈한 인연이 지나치게 강조되자 어두운 그림자도 짙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왜곡하거나 턱없이 미화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런 약점이 있다고 해서, 값진 전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조선 사람들은 ‘계회’(계모임)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회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조직의 구성원을 대등하게 대접했고, 상호 존중하는 전통을 대대로 이어갔다. 각종 사회조직은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도 기꺼이 담당했다.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불치의 한국병처럼 굳어진 오늘날에, ‘혼밥’과 ‘혼술’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비정하고 메마른 이 시대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우리가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든 역사 흔들어 깨울 시간 

누구든 자신의 역사를 통해 절망을 헤쳐 나갈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 자기애에 사로잡힌 복고주의자의 함성이라면, 그것은 물론 위험천만하다. 또, 역사적 운명론에 빠져 필연적으로 어찌어찌 되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몽상적인 발화(發話)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역사의 샘물을 함께 길어 마시고, 앞길을 개척할 강한 힘과 늠름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썩 달라진다. 이제 깊이 잠든 우리의 역사를 흔들어 깨울 시간이다. 아니, 우리 자신이 눈을 비비고 일어날 때이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