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과 '무지' 그리고 '횡포'를 이기며 살아가려면?
백승종의 역사칼럼
#1. 대나무만은 심지 않으리라
자하 신위는 시서화로 이름이 높았다. (...) 그가 지은 시 가운데는 악부(樂府, 역사와 풍속 등을 한시로 기록한 작품)도 있었다. 귤산 이유원의 《임하필기》(제28권)에 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신위의 악부는 서민의 일상을 꾸밈없이 기록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고답적인 성리학 전성시대의 문장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한문학이 서민 대중을 당당한 독자로 대접하는 근대문학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역사적 이정표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읽을 작품은 하나같이 무명씨의 시조를 한시로 번역한 곡조들이다. 먼저 죽미곡(竹謎曲)에 나오는 노래 한 곡조를 꺼내보면 이러했다.
백 가지 꽃을 다 심어도 좋으나
대나무만은 심지 않으리라.
화살대는 가고 오지 않으며 대금은 원망스럽기만 하다.
가장 나쁜 것이 그림 그리는 붓대라, 그리움만 적을 뿐이니.
人間百卉皆堪種 惟竹生憎種不宜
箭往不來長笛怨 最難畫出筆相思
상사(相思)의 괴로움을 이보다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항간에 널리 알려진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신위처럼 고명한 문장가들도 서민문학을 진지하게 수용하였으니 바람직한 변화가 아니었나 싶다. (...) 금로향곡(金爐香曲) 나오는 노래도 읽어보자. 앞에서 읽은 곡조와는 차원이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금로(금향로)에 향이 다 타고 누성(물시계 소리)이 그치도록
어디 가서 누구에게 사랑 바치다가
달그림자가 난간 위에 올랐을 즈음에야
맥脈 받으러 왔는가.
金爐香盡漏聲殘 誰與橫陳罄夜歡
月上䦨干斜影後 打探人意驀來看
난봉꾼 남편 때문에 속앓이하는 아내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시이다. 아내는 향불을 피워놓고 그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건마는 그는 바람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달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새벽이 다 되어서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제아무리 미워도 야멸차게 밀어낼 수만은 없는 아내의 마음을 토로한 시가 아닌가.
이제 이렇게 마음을 꾹꾹 누르며 살던 세월의 강은 저 멀리 흘러가버렸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랑과 이별의 몽환과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살을 에는 듯한 아픔과 그리움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세월이 암만 흘러도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를 그만둘 수 없을 테니까. 하면 조선 시대의 사랑 노래는 지금도 얼마간 유효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이 청춘의 한 남성과 한 여성에 그치는 것일까. 세상을 이미 작고하신 부모님도, 스승도 우리는 그리워한다. 은은하지만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뿐이랴. 나보다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사랑하는 반려견, 반려묘일 수도 있다. 이미 세상을 버린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일 수도 있다. 집 나가서 여직 돌아오지 못한 이 땅의 민주주의 같은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폭정이 날마다 계속되고 있는 데다가, 온갖 아첨을 떨고 있는 간도 없고 쓸개도 사라진 사람들의 추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오늘 아침에도 이마를 스친다.
#2. 살만 루슈디의 '풍자의 힘'을 생각하며
“외국인들은 (두고 온) 집을 잊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와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다.” (122~123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 관계를 맺다(산타페, 서기 1492년)」)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 루슈디는 수년간 지속되었던 그들의 역사적 흥정을 풍자적 소설로 다시 썼다. 어이없게도,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에게 끈질기게 추근거리며 '관계'를 요구했다고 말한다. 기발한 화법이다. 맞다. 콜럼버스는 스페인과 무관한 존재였으나 이사벨여왕의 도움이 필요했을 터이다. 스페인과 거래를 하고 싶은 그의 욕망은 곧, '관계'에 대한 열망이었다. 루슈디는 제대로 역사적 행위의 본질을 읽었다고 본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물의 본질을 뚫어보는 작가였다.
1988년 루슈디는 <<악마의 시>>라는 소설을 발표해,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를 흥분시켰다. '신성모독'이란 죄명이 씌워졌고, '파트와'의 집행대상이 되었다. 다들 기억할 것이다. 이슬람세계는 루슈디를 문자 그대로 죽이려했다. 다행히 영국 경찰이 그의 신변을 잘 지켜주어서 위기를 벗어났다.
루슈디처럼 기발하고,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작가가 세상에 흔치 않다. 내 생각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루슈디와 같은 풍자 작가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직접적인 독설이 날마다 쏟아지면 사람은 지치고 마음도 메마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정권의 무능과 무지 그리고 횡포를 이기며 살아가려면 익살과 해학이 필요한 것으로 본다. 당장에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으므로, 우선은 틈나는 대로 이 작가, 루슈디를 사귀어 보는 것이 어떨지.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