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승종의 서평

2023-09-01     백승종 객원논설위원
'20세기 이데올로기' 책 표지(윌리 톰슨 지음, 전경훈 역, 산처럼, 2017)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갈등은 단순한 이권 싸움이 아니다. 지역갈등만도 아니고, 사회계층 간의 충돌만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우리사회는 지금도 “이데올로기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남한과 북한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 사정도 그러하다.

진보와 보수, 종미(從美)와 자주, 개혁과 수구꼴통, 자본과 반자본, 종북과 파쇼라는 대립 항이 있기는 하나, 그런 식의 이분법으로 복잡한 사회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늘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한 권의 쓸모 있는 책이 있다. 이 책을 한번 읽기만 하면 희미하던 우리 머릿속이 광명을 찾은 듯, 갑자기 환하게 밝아질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저자 윌리 톰슨(1939년생)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가이다. 에릭 홉스봄, E. P. 톰슨과 궤를 같이하는 진보적인 학자이다. 그는 지구의 현대사에 주목하여,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의 70여년을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로 보았다. 이 표현은 그가 창안한 것은 아니고 홉스봄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저자는 현대사를 여러 면에서 '극단'으로 이끈 것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그것도 단수가 아닌 복수의 이데올로기들이었다!

현대사의 심층에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흐르고 있었다. 그 4가지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할 때도 있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융합되기도 했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성립시키는 입각점은 다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인류가 경험한 역사적 실제는 훨씬 복잡하였다.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변수를 수용함으로써 무궁무진한 변주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상호간의 구별이 애매할 때도 적지 않았다. 특히 각 나라마다 '민족주의'라고 하는 상수가 엄존하고 있어, 지구상의 이데올로기는 더더욱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윌리 톰슨의 역사적 통찰은 빛난다.

그가 만일 정치학자 또는 철학자였더라면,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론적 분석에 안주하였을 것이다. 그가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였더라면 어땠을까? 몇 개의 전형적인 모델에 집착하였을 가능성이 컸으리라. 다행히도(!) 톰슨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지난 70여 년 동안 전 지구를 지배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복합성을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으로 판정하지 않았다. 그의 역사적 통찰이 갖는 장점은 눈부시다. 톰슨은 지구상의 여러 문화권마다 이데올로기의 양상이 다르게 전개된 사실에 주목하고, 그 점을 내부자와 외부자의 교차된 시선으로 해명하였다. 해당 문화권의 역사적 전통과 국제 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작동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두루 읽힐 것이다. 그렇다면 톰슨은 북한 사정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했을까? 그는 국제적인 정치 환경을 고려하여, 1980년대 이후의 북한의 변화를 짧지만 요령 있게 분석했다.

“북한 정권은 크메르루주의 사이코패스와 같은 행동을 따라 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모델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이 모두는 미국이 북한의 국경에 가하고 있는 심각한 군사적 위협 때문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북한은 모든 것을 국가 방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최고 지도자 김일성의 과대망상적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과 비교하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차라리 느슨하고 자유롭게 보일 정도였다.”(481쪽)

톰슨의 생각을 내 나름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톰슨은 북한 정권의 작동방식을 권위주의/보수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공산주의의 결합으로 간주하였다. 둘째, 북한의 체제는 크메르루주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현대 중국보다는 훨씬 가혹하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흡사한 파시즘 국가라는 판단이다.

셋째, 북한이 이렇게 된 데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이란 존재가 북한에게는 심각한 생존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북한의 지배자인 김일성의 개인적인 성향 곧 그의 과대망상이 북한의 현실을 더욱 특수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우리가 톰슨의 주장에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흥미롭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넘어서 이명박, 박근혜와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북한과 유사한 점이 않았다고 생각한다. 파시즘, 권위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와 권력자의 과대망상! 북한사회에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요소가 적은 것 만큼이나 남쪽에는 자유주의의 색채가 흐렸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러한 특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성리학 제일주의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아도 비슷할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문화적 결정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문화적 성격은 서서히 형성되는 만큼 그것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톰슨이 북한 문제를 거론할 때 “문화적 특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화야말로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물줄기가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책 뚜껑을 덮었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