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할 길-의병과 시민운동의 '접점'
백승종의 역사칼럼
조선 의병의 전통은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긍익의 역사책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에는 16세기 말에 활약한 의병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킨 선비는 곽재우였다. 1592년 4월 27일,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이겼다. 의병을 일으킬 때 곽재우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
“적병이 이미 박두하였다. 우리의 부모처자는 장차 적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 고을에 나이가 젊어 (적과) 싸울 수 있는 장정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만약 마음을 모아서 정암나루(鼎岩津, 경상남도 의령군)에 진을 치고 방어전을 편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떳떳하고 아름다운 선비의 모습
곽재우는 재산을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자신의 의복을 의병들에게 나눠 입혔고, 처자의 옷을 가져다 의병의 가족들에게 주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 입은 장수)”이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다. 곽재우가 거느린 의병은 일본군과 싸워 수십 차례를 이겼다. 경상우도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허목(許穆)은 「망우공유권서(忘憂公遺卷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온 나라가 함락될 지경이었으나, 남쪽 지방 사람들은 그를 장성(長城)처럼 믿었다. 왕도 그를 장하게 여기며, 그의 명성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곽재우에게 궁중의 수비를 맡겼다. 그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대고 곧 고향 마을로 물러갔다. 곽재우는 자신이 전란 때 세운 공훈을 자랑하지 않았고, 초야에 묻혀 살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얼마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선비의 모습이었던가. 왜란의 혼란 속에서도 참다운 선비들이 있었다. 앉아서 조용히 죽음을 맞을지언정 결코 지조를 잃지 않은 의병장들이었다. 전라도 나주 출신 김천일(金千鎰)과 양산숙(梁山璹)이 대표적이었다.
1593년(선조 26) 요충지인 경상도 진주가 왜군에 포위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그러자 김천일은 의병을 이끌고 사지로 쫓아갔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진주성을 떠나 목숨을 보전하라고 강권했다. 김천일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촉석루 한쪽을 끝까지 수비했다. 적군이 성 위로 올라오자, 그는 엄숙하게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적의 칼을 받았다.
양산숙 또한 호남의 선비로서 김천일의 휘하에 있었다. 김천일을 따라 죽지 않아도 무방한 처지였다. 김천일은 그에게 성 밖으로 탈출하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양산숙은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김천일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항복은 김천일과 양산숙의 절개를 기리며, “평소 행동이 독실한 선비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으랴” 하고 탄식했다.
이렇듯 임진왜란 때에도 의병은 빛을 발했다. 선비는 마을의 스승으로서 평일에는 뭇 사람들의 사표(師表)였다. 국난을 당해서는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아서 군자금으로 썼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국운을 바로잡았다.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졌기에 구한말에도 많은 선비들이 의병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전통의 단순한 '답습' 아니라 '재창조' 절실히 요구
어떤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에 대한 국가의 대접이 소홀해서, 그 뒤에는 의병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믿지 못할 낭설에 불과하다. 최익현, 임병찬, 고광순, 김동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장들이 조국의 산하를 끝까지 지켰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의병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생사를 건 어려운 사업이었다. 어찌 선비들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들의 곁에는 생사를 함께 한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사회의 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선비로 형상화된 양심적 지식인은 제 한 몸의 지조를 지킬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감화된 무수한 이웃들까지도 의인(義人)으로 바꿔 놓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웃한 여러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독재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꿋꿋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들과 뜻을 함께 하여 행동으로 연대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모두가 거센 저항운동으로 폭력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간의 시민운동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의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식인과 시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곡된 역사 흐름을 바로잡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사이 성리학은 거의 명맥이 끊어졌고, 갓 쓴 선비는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과 서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선비들의 사회문화적 활동도 끝이 났다. 의병운동은 그 마지막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 선비의 전통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이렇게 살아남아서 현대 한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더욱 뚜렷한 의지를 가지고 선비의 길을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의 변화된 세상에 걸맞게 선비의 전통을 되살릴 방안을 숙고할 때다. 전통의 단순한 답습이 아니라 재창조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누적된 갈등과 대립의 분화구를 깨끗이 쓸어내고, 실의와 절망에 빠진 대중에게 소생의 기운을 불어넣을 방법을 본격적으로 궁리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선비의 떳떳한 길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