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꽃 속에 사랑을 지닌 사람들
신정일의 '길 위에서'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창밖을 바라보면 푸른 산은 보이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치 만리장성같이 견고한 아파트 숲이다. '큰 도시는 큰 고독을 의미한다'는 로마 속담과 함께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 새 오래전 일이다. < 나는 가수다>에서 <여러분>을 열창한 임재범이 1등을 하고서 쓸쓸하게 털어놓았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할 만한 친구가 없다"
어디 그 뿐이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은 많은데, 마음 놓고 얘기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정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저마다의 성을 쌓아 놓고 그 안에 비밀의 상자를 가득 쌓아 놓았으므로 그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자꾸 이기심과 욕심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우정은 사랑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정 자체 속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화음·음조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들 머리 위의 참나무들, 또 모두가 하나의 유일한 목적으로 가까이, 가까이 하나로 모여들며 에워싸는 숲은 서로 나란히 똑 바로 향해 반듯하게 서 있다. 모두는 각자 자신의 꽃 속에 사랑을 지니고, 자체 속에 사랑을 지닌다. 오직 사랑에서만 나무들이 소생할 수 있고, 오직 나무들에서만 숲이 생긴다.
친구들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 전체이다. 하나하나가 보다 가까이 서 있을 때 이들은 친구라고 불려진다. 그같이 서로서로 모이는 전체는 서로가 장애를 준다. 이들은 이 같은 그림 같은 무리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같이 푸른 나무에 덮여 녹음의 아치를 둥글게 만들 때 이러한 것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두 가지는 가끔 동시에 나타나며 그리하여 하나의 나무는 숨을 들이키며 내쉬기 위해 하늘의 높은 데로 향해야 했던 자기 자신의 생을 거역하고서 늘 다른 나무를 위해 희생한다. 서로 나란히 푸르름과 시들음이 하나로 서 있는 모든 것은 숲에 속하며, 조만간 죽게 되는 자신을 깨닫거나, 그와 동류에 속하는 모든 것은 우정에 속한다.“
독일의 극작가인 브렌타노의 <고드비 2>에 실린 글이다. 하나의 물방울에서 비롯되어 하나하나의 지류를 받아들여서 서로 얼싸 안고 흐르는 강물은 화엄의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이익 때문에, 그렇게 두텁게 보였던 우정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길을 홀로서 간다. 말 그대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꽃 속에 사랑’을 지니기 때문이고, 시간이라는 손님이 우정의 힘을 퇴색시켜 사라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도, 지혜도, 높은 문벌도, 뼈의 힘도, 봉사의 공적도, 사랑도, 우정도, 자선도 다 시기하고, 중상 모략하는 시간에는 노예일 뿐이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 세상의 이치, 그렇다면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책, 음악, 아니면 그 무엇에?
사람들은 자신의 꽃 속에 사랑을 지닌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