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릴 수 없는 마음이 '슬픔'
신정일의 '길 위에서'
꿈인 듯 생시인 듯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저 소리는 밤의 억겁 속에서 내 혼곤한 잠을 깨우는 영혼의 소리. 나는 일어나라는 영혼의 소리와 더 잠을 자라는 육체의 소리 속에서 헤매다가 그래도 일어나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책들은 단지 책이라는 형체로 나를 바라보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문득 다시 올 수 없어서 슬픈 유년의 기억들이 활동사진처럼 떠올랐다.
비 내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토방 마루에 나가면 초가지붕 추녀 끝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큰 바위의 움푹 패인 작은 골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 이 비가 언제 그치지? 내 상념의 벽을 뚫고 들리는 소리.
”비 많이 오는 갑다 어서 들어와 더 자야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그랬다. 그 때쯤이면 잠은 멀리 달아나고, 돌담 너머 상관이네 집, 그 너머 현자네 집을 너머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여명. 어둠 속에 산 그림자 길게 드리운 시내 너머 마을 앞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라지려는 기억들을 더듬고 있는 어느 사이 희뿌연 날이 밝았다.
“기억은 흡사 영혼의 위장과 같다. 기쁨이나 슬픔은 마치 달고 쓴 음식물처럼 일단 기억에 넘겨지면 흡사 위장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그 속에 있기는 하지만 맛을 볼 수는 없다. (...) 그러니까 어쩌면 되새김 할 때 음식물이 위장 속에서 올라오듯, 우리가 무언가를 회상하게 되면 기억 속에서 기쁘고 슬픈 일들이 올라온다. 그렇다면 말을 할 때, 다시 말해 무언가를 회상할 때 우리는 왜 의식의 입 천장에서 기쁨의 단맛과 우수의 쓴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바로 이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비유는 완전한 비유가 못 되는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실린 글이다. 지나간 날, 유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데 기쁨의 단맛은 없고 처연한 슬픔과 같은 쓴맛만이 떠오르는 걸까?
다시 또 오늘 오후부터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다. 오래된 옛 기억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잊어버릴 수 없는 이 마음이 슬픔이요' 라는 누군가의 말과 같이 잊고 싶은 기억까지도 잊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다.
오늘은 거창 지방을 거닐다가 내리는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김수영 시인이 말한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라는 싯구절을 음미하면서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걸어갈 수 있을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