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갈 수 없는 이순신의 지혜

백승종 칼럼

2020-07-25     백승종 객원기자

주말에 아산 현충사를 다녀왔다. 답답해도 가고 신이 나도 가는 곳이다. 한적한 현충사 경내를 걷노라니, 최근에 읽은 이야기 몇 개가 저절로 떠올랐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남해안의 사정을 잘 알 턱이 없었는데, 일단 적이 쳐들어오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거기에는 무슨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좌수사 이순신은 날마다 해가 지면 남녀 백성을 수영 마당에 모았다. 백성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것이었다. 밤이 깊으면 이순신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 백성을 대접하였다. 그는 평복 차림으로 백성들과 일상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좌수사를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서로 웃으며 농담도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주고받은 이야기 가운데는 고기 잡고 조개 캐며 지나다닌 바닷길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항구는 소용돌이가 심해서 아차 잘못하면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숨은 암초가 많아 십중팔구 배가 깨진다.’ 이순신은 이런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해두었다가 날이 밝으면 현장을 찾아가 확인하였다. 거리가 먼 곳은 장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성대중, ‘청성잡기’, 제5권)

좌수사 이순신은 참으로 지혜가 있었다. 백성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깊은 신뢰와 정을 쌓았고, 장차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였으니 말이다.

이후 일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이순신은 후퇴하는 척하며 왜적을 함정으로 끌이기 일쑤여서 굳이 힘들여 싸우지 않고서도 이길 때가 많았다. 우암 송시열은 이런 이순신을 극구 칭찬하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재상도 충무공처럼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순신이 남해안 바닷길을 훤히 알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휘하에 어영담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남해안 여러 곳에서 근무하였는데, 평소에 물길을 자세히 조사했다. 이순신은 그를 곁에 가까이 두고 도움을 받았다.

유명한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은 지리를 이용해서 적을 물리친 것이었다. 유능한 부하의 아낌없는 조력을 받는 것도 충무공의 장기였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명나라가 파견한 수군이 외려 짐이 될 때도 있었다. 무술년(1598) 2월 3일의 일이었는데, 진린 제독은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공격하였다. 얼마 뒤 썰물 때가 되어 이순신이 전투중지를 요청했으나 진린이 그 말을 무시했다. 그 바람에 명나라 수군이 탄 23척의 배가 개펄에 갇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왜적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위기가 연출되었다. 다행히 이순신이 나서서 1백 40명의 명나라 수군은 목숨을 구했으나, 이 전투로 명나라는 23척의 전함을 잃었다(신흠, ‘상촌선생집’, 제56권). 진린이 이순신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곰곰 생각할수록 이순신은 정말 큰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장부가 태어나서 벼슬을 얻으면 몸 바쳐 일할 것이요, 그런 기회가 없으면 농사짓고 사는 것이다. 권세가에게 아부하여 부귀를 훔치는 짓은 내가 절대로 하지 않겠노라.”(윤휴, ‘백호전서’, 제23권)

백승종 교수

벼슬길에 처음 나설 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이 말대로 살았기 때문에 고달픈 자리에 있을 때도 초연하였다. 우리는 과연 그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이 글은 <충남도정신문>(2020. 7. 20)에도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