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사’ 특정 사관·정치·이념 개입 배제 돼야...9일 열람 마감, '집단지성' 필요
뉴스 큐레이터 시선
전북과 광주·전남 등 호남지역의 역사적 공동체 기틀 확립을 위해 추진된 ‘전라도 천년사’ 편찬 사업이 발간을 앞두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역사 왜곡과 식민사관 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특정 사관과 이념·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달 9일 열람 기간이 만료되는 '전라도 천년사'를 둘러싼 논쟁은 과연 언제나 종지부를 찍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논란의 쟁점과 해결 과제 등을 짚어본다. /편집주
온라인 공개 기한 2개월 연장...갈등·이견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 정도(定道) 천년을 맞아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호남권 3개 시·도가 추진한 역사서 편찬 사업이다. 역사와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 213명이 집필진으로 참여해 34권 1만 3,559쪽에 달하는 전라도 오천년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호남권 3개 광역자치단체가 24억원을 들여 추진한 역사 기록 프로젝트 ‘전라도 천년사’ 편찬사업이 자칫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역사 왜곡 등 일제 식민사관 논란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회(편찬위·위원장 이재운 우석대 명예교수)는 지난 4월 24일부터 5월 7일까지 1차 열람 기한 중에 모두 77건의 의견을 접수 받았다.
따라서 충분한 의견 수렴을 위해 온라인 공개 기한과 이의신청 기한을 오는 7월 9일까지 두 달 간 연장한 상태다. 공개 기간이 연장되면서 일단 큰 갈등의 고비는 넘기게 됐지만 여전히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전북과 광주·전남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500만전라도민연대‘(오천년사도민연대·상임집행위원장 박형준. 공동집행위원장 양경님. 김영광)'는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회'의 입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통절한 반성과 사과, 자진 해체"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편찬위 내에 식민사학자들이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식민주의 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으로 양분돼 비판과 논쟁에 가세한 형국이다. 자칫 ’전라도 천년사‘ 편찬 사업이 당초 취지와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돼 지역 내부의 갈등과 분란만 확대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역사 왜곡, 식민사관 등 둘러싼 치열한 논쟁 언제까지?
‘전라도 천년사’ 논쟁은 단군조선, 마한, 마한, 가야, 임나일본부설 등을 소환해 지역 안팎의 역사 인식을 제고하면서 발단이 되고 있다. 과거 해방 전후사 인식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학계를 중심으로 이데올로기적 아마겟돈이 있었다면 이번 ‘전라도 천년사’ 논쟁은 역사 왜곡, 식민사관 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비판론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전라도 천년사’ 논쟁은 어느 세력의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역사적 팩트에 기인해야 하며 호남의 역사적 공동체 기틀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편찬이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전라도 천년사' 일부 내용에 대한 역사 왜곡 논쟁은 진행 중이고 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편찬위 측은 이달 9일까지 책 내용에 대한 의견 수렴을 거친 뒤 공개적인 학술토론회를 준비하고 있지만 역사 왜곡을 제기한 오천년사도민연대와 일부 정치인사들은 여전히 반대 또는 백지화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 의견을 모으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배가 산으로 가거나 좌초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는 지적들이 나오는 이유다.
편찬위 “일본서기 지명 활용이 ‘식민사관에 입각한 연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단순 논리”
이와 관련 지난달 27일 KBS전주총국 <심층토론> 에서는 그동안 ‘전라도 천년사’ 문제 제기를 해 온 오천년사도민연대 측과 편찬위 측과의 세 번째 TV 공개 토론회를 가져 주목을 끌었다. 앞선 토론들과 달리 이날 공개 토론에서는 ‘일본서기’ 지명 인용,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를 주제로 토론이 진행돼 이목을 끌었다.
이날 공개 토론에는 편찬위 측에서 조법종 우석대 교수(전라도 천년사 선사고대간사), 강봉룡 목포대 교수(선사고대 집필위원)이 패널로 참여했고, 오천년사도민연대 측에서는 박형준 도민연대 대표, 이찬구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공동대표가 패널로 참여했다.
토론 서두에서 편찬위 측 조법종 교수(우석대)는 ‘전라도 천년사’란 제목으로 전라도 지역 통사를 편찬한 취지를 설명한 뒤 “고대사 분야의 성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그 이전 마한과 가야의 역사를 포괄하여 역사상 발전 모습을 정리하였으며, 특히 마한의 ‘한’으로부터 진한, 변한 ‘삼한’의 명칭이 비롯되었고 이것이 결국 우리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호의 뿌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날 첫 번째 토론 주제인 ‘일본서기’ 내 지명 인용과 관련하여 강봉룡 교수(목포대)는 “‘일본서기 지명 활용이 곧 식민사관에 입각한 연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단순 논리로, 그럼에도 연구자들이 ‘일본서기’ 지명을 연구하는 것은 그 안에 백제계 사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들을 인용하고 있고, 백제사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법종 교수는 “기문, 임나 등의 지명 사용 시 한국, 중국 측 사료검토를 먼저 진행하고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 비판과 교차 검증을 한 후 해당 지명이 마한, 가야의 지명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또한 “‘기문’지명의 경우 일본서기보다 앞선 시기의 중국 문헌인 ‘양직공도’, 국내 사료인 ‘삼국사기’의 여러 판본에서 ‘기문’ 표기를 볼 수 있다”며 “기문이 학자에 따라 남원 및 다양한 지역에 비정되었다”고 부연했다.
오천년사도민연대 “마한 역사 530년까지 존속 여부, 문헌적 근거 없다‘
편찬위 측 패널들은 이날 “이덕일 소장 및 오천년사도민연대 측에서 주장하는 ‘일본서기의 지명은 일본 열도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내용은 북한학계의 학설을 따른 것인데 이 견해를 대표하는 북한학자인 조희승이 저술한 ‘백제사연구’에서도 양직공도의 지명을 ‘상사문’이 아닌 ‘상기문’으로 읽고 있다”고 주장하며 “오천년사도민연대 측의 주장이 모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두 번째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와 관련된 토론에서 오천년사도민연대 측 이찬구 대표는 “마한의 역사가 530년까지 존속 여부에 대한 문헌적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편찬위 측 강봉룡 교수는 “1980년대 이후 이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많은 옹관고분이 발굴되었고, 백제와는 완전히 다른 옹관고분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이 지역의 독자세력이 곧 마한 세력”임을 강조했다.
덧붙여 “지금까지 고대사, 고고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마한역사문화권정비법’지정, 가야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등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밝히며 “이와 같이 노력한 연구자들을 이미 폐기된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로 규정, 규탄, 선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정 사관 입장 강조·정치적 영향력 확대 논란이라면 바로 잡아야
그러나 오천년사도민연대 측은 "전라도 천년사를 보면 남원의 옛 지명을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적힌 '기문국(己汶國)‘으로, 장수는 '반파국(伴跛國)’으로 썼다"며 ”이런 지명은 삼국사기 등 국내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오천년사도민연대는 "일본 극우파가 날조한 용어가 버젓이 책에 쓰인 것은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라며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의 혼과 얼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했다”고 강조해 왔다. 현재 ‘전라도 천년사’의 전체 내용은 온라인에 공개돼 있어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은폐, 왜곡하고 있다면 반드시 지적되고 바로 잡아야 옳다. 그러나 대규모 연구사업에 대해 특정 사관의 입장만을 강조한다거나 정치·이념적 영향력의 확대와 관련돼 있는 논란이라면 이 또한 바로 잡아야 마땅하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집단지성의 힘이 절대로 필요한 시점이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