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칼럼에 대한 반론3: 실종된 지식인의 역할
독자 투고
호남 혐오를 부추기는 복합쇼핑몰 이슈몰이
점입가경이다. 보수가 애써 감춰왔던 반호남주의 본색이 거추장스러운 이성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마각을 드러냈다. 차마 터지지 못한 증오와 혐오의 말들이 이미 터져버린 증오와 혐오의 말들을 감싸며 터진다. 호남을 향한 저주와 혐오의 발언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호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하와 모욕이 이어지고 있다. 증오와 폭력의 언어가 부유하고 악의로 가득 찬 섬뜩한 표현이 난무한다.
혐오와 차별은 나쁘다는 최소한의 도덕관념에 가로막혀 있던 온갖 저급한 발언들이 복합쇼핑몰 이슈가 부각된 것을 계기로 득의양양한 태도로 공론장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 있다. 호남은 복합쇼핑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고 조롱받아야 마땅한 집단이라는 정당화된 차별구조의 틀에 포획됐다. 이러한 병리적 징후를 온라인 세계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난 대선 정국 당시 보수 세력이 주도한 복합쇼핑몰 이슈를 둘러싸고 노정된 광란의 반응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복합쇼핑몰 이슈는 혐오를 공약의 형태로 위장한 기만책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사회적 집단을 증오하고 혐오하기 위해 만들어낸 편협한 논거를 지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포장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위선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복합쇼핑몰의 유무 여부가 지역 정치권의 역량과 자질을 가늠하는 절대적 기준이 됐나 싶다.
대선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 공약은 지역개발을 골간으로 구성된다. 모든 지방의 공통된 고민은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이다. 그리고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요인은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이다.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게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지역을 의식한 정책공약은 지역민의 소득기반을 확충할 기업과 산업유치, 공공기관 이전, 예산 증액, SOC 확충 정도로 좁혀진다. 이게 상식이다. 지역민의 표심이 수도권 일극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윤석열이 호남 지역의 대선 공약으로 복합쇼핑몰 유치를 전면에 내세운 건 상식에 갇힌 기존의 상상력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보 같은 발상이다. 지역 경제의 실질적인 발전과는 별 관계가 없는 소비시설 유치가 핵심 공약으로 부각되는 건 블랙코미디이다.
다른 지역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산업이 취약한 호남에 절실한 건 지역민들에게 소득을 안겨줄 산업시설과 생산수단이다. 지역민들이 돈을 쓰는 소비시설이 지역경제의 성장에 기여하는 바는 미미하다.
싸우면서 닮는 걸까? 보수 세력이 완전히 실패로 규정한 문재인 정부의 ‘소주성(소득 주도 성장)’이 표현을 달리해 나타난 것이 바로 윤석열의 ‘쇼주성(쇼핑몰 주도 성장)’이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양자 모두 한심하기가 난형난제다. 정말로 호남의 민심을 진지하게 추구할 생각이 있긴 한 걸까.
복합쇼핑몰이 그렇게 중요하고 지역발전의 핵심이라면 왜 호남만 집요하게 집착하는 걸까? 부산 가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산업은행 이전 대신에 쇼핑몰을 유치한다고 하면 부산 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고도 호남에서 보인 태도처럼 기세등등 처신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복합쇼핑몰 유치 공약이 진지하게 취급되고, 심지어 호남 혐오의 여론을 비등하게 만드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특정 소비시설이 없는 게 특정 지역을 마음껏 혐오하고 조롱해도 된다는 구실로 기능하는 광기 어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복합쇼핑몰 공약에 탑재된 반(反)호남 이데올로기
소비시설의 가치가 산업과 생산시설의 가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엉뚱한 발상은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다. 따라서 복합쇼핑몰 이슈가 가십거리가 아닌 진지한 화젯거리로 통용되는 황당무계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를 억누르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데올로기론의 선구자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감추고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보았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진기의 어둠상자(Camera Obscura)를 비유로 들었다. 사진기의 어둠상자에서 피사체의 전후가 반전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인과관계를 전도시켜 우리에게 가상의 현실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진 가상의 현실 속에서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 착취와 피착취의 권력관계는 착종돼 은폐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임과 동시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인 것이다.
복합쇼핑몰 이슈엔 반(反)호남 이데올로기가 얹혀 있다. 복합쇼핑몰 유치 공약이 보수 네티즌들의 가슴 깊은 곳의 그 무언가를 자극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내세우는 혐오의 논리는 호남이 퇴행적인 좌파 이념에 매몰돼 좌파 민주당에 맹목적인 몰표를 주니까 호남은 복합쇼핑몰조차 없는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것으로 요약가능하다. 혹은 호남 시민들을 조금 걱정해주는 척, 좌파 민주당이 복합쇼핑몰 유치를 막으니까 호남이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입장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호남 시민들의 정치적 선택을 폄훼하고 조롱하고 있다는 점에선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복합쇼핑몰 이슈는 보수 네티즌들에게 막대한 쾌감을 안겨주는 꽃놀이패인 것이다. 그들이 한낱 소비시설에 불과한 복합쇼핑몰의 가치를 분식하고 원리주의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는 복합쇼핑몰 입점을 막은 민주당의 존재가 엄청난 악이 되려면 그만큼 복합쇼핑몰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야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복합쇼핑몰 이슈는 이분법적 논의구도로 예각화돼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복합쇼핑몰 입점에 찬성해야만 친시장주의에 입각해 지역개발을 긍정하는 합리적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합쇼핑몰 입점에 반대하는 건 경제성장에 반대하고, 지역경제를 국가예산에만 의존하고자 하는 퇴폐적인 반시장주의의 발로라는 천문학적인 비약으로 이어진다. 민주당과 그 지지기반인 호남을 좌파로 몰아세우려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합쇼핑몰 이슈는 호남차별과 소외의 원인과 결과를 뒤섞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창출한다. 왜냐하면 호남이 선택한 좌파 민주당이 복합쇼핑몰을 막아 호남을 낙후시킨다는 논리에 담긴 함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호남의 낙후는 좌파 민주당에 몰표를 던지는 호남의 정치적 선택이 초래한 인과적 결과, 쉽게 말해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복합쇼핑몰 이슈와 함께 촉발된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당도하게 될 필연적 귀결이다.
복합쇼핑몰 이슈가 전달하는 의미는 문제는 호남이라는 것이다. 호남이 소외되고 낙후된 건 영남 패권 세력의 경부선과 수도권 중심의 편향적 개발정책 때문이 아닌 경제개발을 부정하는 퇴행적인 좌파 세력만 지지하는 호남의 주체적 선택 탓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호남이 차별받고 혐오 받는 이유는 보수 세력의 반호남주의 탓이 아닌 호남이 퇴행적인 좌파 이념에 자발적으로 참절돼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호남 바깥에 존재하는 호남차별과 소외의 책임은 호남 내부의 문제로 전가돼 영남 패권의 죄악은 면죄된다. 역사적 인과관계가 반전되니 윤리적 가치판단 또한 반전되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가?
수그러들 줄 알았던 호남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치밀하고 비열하게 포장되고 있다. 복합쇼핑몰 이슈몰이를 중심으로 이런 악의와 지역비하는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호남의 경제적 낙후와 소외 또한 이러한 혐오 현상에 기대어 합리화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게 드러났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감추고 정당화해 현실을 왜곡한다. 그래서 반호남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보편타당한 관점을 대변할 수 있다고 전통적으로 견지돼온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불신과 회의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더라도, 이데올로기 비판은 여전히 필요한 지식인의 덕목이다. 지식인은 현실에 대한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직시하고 그 이면에 깔린 권력의 추악한 실체를 용기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영남 패권주의에 맞서 호남을 옹호하고 수도권 일극주의에 저항하며 지역균형 발전을 역설해온 강준만이 이러한 반호남 집단광기를 수수방관하고, 심지어 은근히 편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강준만은 경향신문 2022년 4월 13일 자에 게재한 <복합쇼핑몰은 ‘광주 정신’을 훼손하는가?>라는 칼럼에서 민주당을 비판한다. 추상적이며 자의적인 광주정신 운운하면서 복합쇼핑몰 찬성 여론을 억압하지 말라고 지적한다. 실망스러운 얘기다. 이건 허수아비 논법이다. 복합쇼핑몰을 반대하며 실체가 없는 광주 정신을 근거로 내세우는 민주당 일부의 논리는 비웃음거리가 된지 오래이다. 그 논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복합쇼핑몰 논의에 있어서 시민들의 여론형성에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최저질의 논리를 가져와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핵심인양 다른 시각들을 호도하는 것은 반칙을 범하는 것이다. 정말로 논의해야 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 논의의 초점을 엉뚱하게 틀어버리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것밖에 없는 걸까.
또한 강준만은 뜬금없이 문재인 정부의 실패에 대해 호남 민중이 져야 할 책임은 없는지를 묻고 있다. 대의제의 기본도 모르는 발언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이 최근 잘 갈파했듯 대의제는 시민이 자유롭고 정치가가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같은 논리라면 시민을 학살하고 국가 부도를 야기한 정치세력의 지지기반인 영남 민중이 져야 할 책임은 없는 걸까? 강준만은 영남 민중을 향해 이렇게 공세적으로 말한 적이 언제 있었나?
한창 김대중과 전라도를 팔아먹으며 낙양의 지가를 올릴 때에도 호남을 차별하지 말아달라고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지 이 정도 수위의 얘기를 한 적은 전무한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호남 민중엔 전혀 다른 자세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지금까지 호남을 옹호하고 비호했으니 이 정도 비판은 허용될 수 있겠다는 심산인가? 그것은 강준만이 혐오하는 운동권식 도덕적 우월감과 보상심리가 아닌가.
호남이 민주당만 뽑는 이유는 보수 세력에 내재된 반호남주의 때문이다. 또한 민주당이 호남 차별과 소외를 대변해왔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강준만도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결속된 양자의 밀접한 관계가 이젠 효용과 수명이 다했다고 보는 건 물론 강준만 개인의 자유다. 그렇다면 보수정당이 민주당의 자리를 대신해 호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도록 고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즉 보수 세력의 고질병인 반호남주의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그간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개발시켜 줄 것을 주문해야 한다. 그러니까 보수정당의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이는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다. 보수정당이 진정 호남표가 탐난다면 호남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정치다. 그런데 보수정당은 호남의 이해관계, 호남 시민의 삶을 여전히 고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국가 예산은 별로 투입되지 않고, 호남의 경제 발전에 별 도움도 안 되는 복합쇼핑몰 유치 공약을 전면에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호남을 완전히 우롱하는 처사다. 그리고 보수 네티즌들은 복합쇼핑몰 공약에 열광하며 호남을 조롱하고 비하한다. 그들이 환호작약하는 이유는 보수정당을 거부하고 민주당을 선택함으로써 지역 차별과 소외에 저항하고자 했던 호남 민중의 선택이 우매한 선택이었다고 마음껏 희화화하고 비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 영남 패권의 죄악이 은폐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당파성에서 자유로운가?
복합쇼핑몰 이슈는 호남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마타도어에 불과하다. 호남을 때려서 보수 지지층의 내부 결속을 도모하는 유구한 전략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니 되레 과거보다 훨씬 퇴보한 행보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 때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는 보수 정당이 산업화 시절 호남을 소외시켰다고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했다.
강재섭의 사과에서 알 수 있듯 과거 보수 세력은 호남이 낙후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산업화 시절에 한정된 자원으로 집중투자를 해야 했기에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어쨌든 호남이 낙후된 게 산업화 시절 편향적 개발정책 때문이었다는 건 인정했다. 그런데 복합쇼핑몰 이슈에서 엿볼 수 있는 보수의 입장은 호남이 낙후된 건 호남 스스로의 잘못이라는 논리다. 가장 악질적인 왜곡이다. 강준만은 설마 이 얘기에 동의하는가?
강준만이 설마 복합쇼핑몰 공약에 담긴 반호남주의의 약동을 모를까? 아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강준만의 비판은 자취를 감춘 걸까. 강준만은 호남을 대변하는 지식인이 아니었나? 그리고 근래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종식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강준만은 왜 특정 소매시설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특정 지역이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광란의 향연이 온라인 공간을 잠식하는 초현실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걸까? 왜 자신이 자처했던 지식인의 책무를 무책임한 방식으로 방기하는 것일까?
강준만의 침묵은 무지의 소치가 아닌 정치적 계산의 소산이다. 그것은 강준만이 지금의 민주당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남 민심이 민주당에서 이탈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파성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이다. 민주당을 싫어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반(反)민주당 정서에 휩싸여 호남에 대한 혐오의 논리까지 묵과하고, 심지어 일정 부분 영합하는 건 호남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직무유기이다. 무엇보다 강준만 스스로에 대한 모독이다.
호남차별과 소외의 원인은 호남이 아니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와 무관하게 호남차별과 소외의 기원과 책임을 반대로 말하는 걸 용인해선 안 된다. 그런데 명색이 호남을 대변하는 지식인이 이에 부화뇌동하여 호남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걸 어떻게 봐야하는 걸까. 쇠락했고 영락했으며 지속적으로 퇴락하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마주하는 건 적지 않은 당혹스러움을 자아낸다. 호남을 대변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은 지식인이 스스로 존재 의의를 훼손하는 걸 목도하면서 지역구도의 해체는 호남이 영남 패권에 굴종하는 방식으로 달성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해본다.
/이일(30대·광주시민·유칼립투스 광주농장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