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위한 사회보장과 대통령의 인권 의식
백승종의 역사칼럼
누구든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갑자기 찾아온 배우자의 죽음, 특히 가장의 죽음은 가족의 생존을 위협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런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인간들은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고안하였다. 그 가운데는 현대인이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고대사회에서는 ‘형사취수(兄死娶嫂)’, 곧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형사취수’...고대의 관습
‘형사취수’의 풍습은 지구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고구려를 비롯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동,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이러한 관습이 있었다. 고대 유대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형제의 아내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레위기>, 18장 16절).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사취수가 허용되었다. <신명기> 제25장 5-6절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이 있다.
‘형제 가운데 누군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형제의 아내는 시집을 떠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 여성이 재혼관계에서 얻은 큰 아들은, 이미 죽은 형제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 이로써 죽은 형제의 혈통이 대대로 보존되게 할 일이다.’
조금 더 알고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 형사취수의 전통은 뿌리가 매우 깊었다. <창세기> 제38장 8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은 형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하여 미망인이 된 형수와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형사취수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큰 아이는 사망한 혈통상의 아버지가 가졌던 세습권리를 물려받았다. 정확히 말해, 망자(亡子)가 큰 아들이었을 경우에 그 아이의 상속분은 망자가 받을 몫의 두 배로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로써 망자의 가문이 별 문제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미망인 역시 시동생과 재혼함으로써 여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형사취수제도가 강제 결혼은 아니었다. 형수든 시동생이든 어느 한쪽이 그 결혼을 탐탁해 하지 않으면, ‘할리짜’(halitzah)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형수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포기했다. 유대사회도 그랬지만, 형사취수제도는 족내혼의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성행했다. 그런데 유대사회와는 달리 대개의 경우, 미망인이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 미망인의 점지를 받으면 그녀와 반드시 결혼해야 했다.
유교적 도덕 기준과 권력 싸움
그와 같은 점에서, 2세기말에 고구려 왕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장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크게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했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자신의 재혼상대자를 스스로 물색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우씨의 이런 처사를 맹비난했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결혼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말았다.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었다. 그녀의 심야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정치적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협상이었다.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 재위 197-227)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했다. 말 그대로 형사취수한 것이었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렸지만 그것 역시 실패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라는 여성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당사자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한·중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경제주체로서 활동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일찍 사망했고, 설상가상으로 단 한 명의 아들조차 남기지 못했다면, 여간 큰 타격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형사취수제도는 미망인에 대한 든든한 사회보장보험이었다.
경찰의 과잉 폭력과 무차별적인 공권력 남용
어느 나라든지 형사취수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은 망자의 가계를 계승하였다. 그는 망자의 상속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생부의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권이 없었다. 예외는 있었다. 만약 생부가 별도의 재산을 그 아들에게 주기를 원할 경우에는 사회가 이를 허가하였다.
형사취수제도는 일차적으로 혈손이 끊어진 형제의 가문을 지속시키려는 사회적 장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뜻밖에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이기도 하였다. 정의를 지향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약자를 보호할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옳다.
최근 윤석열 정권은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게 막고 있다. 경찰력을 투입해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에게 함부로 상해를 가해 체포하는 상황이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경찰의 과잉 폭력과 무차별적인 공권력 남용은, 대통령의 인권 의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명백하다. 실로 크게 우려할 사태라고 생각한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