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용서’를 아름답다 했는가?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2023-06-05     강준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남들에겐 많은 용서를 베풀되, 당신 자신에겐 그러지 말라.”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 310-395)의 말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의 말이다. “용서는 상처받은 자의 것이다.” 영국 작가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1700)의 말이다. 당연히 그렇긴 하지만, 현실 세계는 정반대로 돌아간다. 인도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약자는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강자의 것이다”고 했다.

“용서만큼 철저한 복수는 없다.” 미국 작가 헨리 휠러 쇼(Henry Wheeler Shaw, 1818-1885)의 말이다. “가장 고상한 복수는 용서다”는 격언도 있다. “적을 용서하라. 용서만큼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없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말이다. 그러나 영국 작가 C. S. 루이스(C. S. Lewis, 1890-1960)는 이런 의문을 표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용서는 인과의 고리를 끊는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사람이 그 일에 대한 결과를 떠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에는 항상 희생이 뒤따른다.” 스웨덴 경제학자로 1953년에서 1961년까지 제2대 UN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던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 1905-1961)의 말이다.

“용서는 단순히 남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나는 용서야말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성공회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1931-2021)의 말이다. 그는 용서의 치유 효과를 역설하는 대표적인 용어 옹호자답게 “용서는 당신에게 좋은 것이다”, “용서는 가장 높은 경지의 자기이익이다”,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다” 등과 같은 수많은 명언들을 남겼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용서](1997)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용서를 특정 목표를 위한 실무전략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일어났으며, 이는 용서의 순수성을 훼손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는 용서가 지나치게 가볍게 받아들여진다며, “용서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결코 화해의 치유법 정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미국 철학자 제프리 머피(Jeffrie Murphy, 1940-2020)는 [용서 이전에(Before Forgiving)](2002)에서 ‘용서 부추기기(forgiveness boosterism)’라는 용어를 사용해, 용서를 심리요법적인 기술이나 강박관념으로 받아들이는 세태를 비판했다. 그는 ‘용서 부추기기’가 용서를 마치 서둘러 해치워야 할 일 혹은 어떤 경우에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일로 몰아감으로써, 분개라는 감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존 스윈튼(John Swinton, 1957-)은 [연민 어린 분노(Raging with Compassion)](2007)에서 ‘용서 부추기기’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치 법과 규칙 또는 가치판단 기준이라도 되는 양, 피해자들에게 용서의 소명에 귀 기울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피해자들을 또다시 ‘용서의 피해자’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 소명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피해자를 더 큰 낙담과 실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용서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덴마크 철학자 토마스 브러돔(Thomas Brudholm, 1969-)은 [분개의 미덕(Resentment’s Virtue)](2008)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진 ‘용서 부추기기’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데스몬드 투투는 자신의 공적 지위를 이용해 용서를 선동하고(또는 부추기고) 강요했다며, 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효과만 일으키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투투는 피해자들에게 ‘첫발을 떼라’고 부추긴다. 피해자들부터 우선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라고 강요한다.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과거 범죄행각에 대해 현재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채 알기도 전에, 피해자 먼저 용서 의지를 보이라고 몰아세운다.”

영국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스티븐 체리(Stephen Cherry)는 이런 비판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투투의 성직자로서의 역할과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리더십을 수년간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를 아무 때고 아무데서나 정치적이고 공개적인 용서를 들이미는 ‘무비판적인 용서지상주의자’라 일컫지 못할 것이다”고 옹호했다.

영국 철학자 이브 제러드(Eve Garrad)와 데이비드 맥노튼(David McNaughton)은 [용서(Forgiveness)](2010)에서 ‘용서 부추기기(forgiveness boosterism)’라는 용어를 원용한 ‘값싼 부추김(cheap boosterim)’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종의 가식이다. 용서가 모든 악행이 빚은 불행을 극복하게 해줄 쉬운 해결책이라는 가식,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람 모두가 시도할 수 있는 편한 접근법이라는 가식,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가식, 즉 어떤 상황에서든 용서에 반대할 만한 도덕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가식이다.”

이렇듯 용서를 둘러싼 논쟁과 논란은 치열하다. 용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건 용서는 그 누구도 쉽게 말해서는 안될 주제다. 고통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흔쾌히 용서가 늘 아름다운 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자. 용서는 아름답다고 외칠 일이 있더라도 너무 큰 목소리는 내지 말자. 이게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용서의 에티켓’이 아닐까?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