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뢰는 ‘독재의 아버지’인가?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2023-05-29     강준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신뢰는 어디서나 독재의 어버이이며, 자유로운 정부는 신뢰가 아닌 경계심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말이다. 신뢰만큼 아름다운 게 없을 것 같은데, 이게 웬말인가. 권력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라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모든 걸 신뢰하더라도 권력만큼은 신뢰해선 안된다는 게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그래서 헌법은 권력의 법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권력 감시와 견제를 위한 각종 제한을 명문화한 게 아니겠는가.

신뢰는 믿음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우리 사회에서 위험한 것은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가브리엘 뤼뱅(Gabrielle Rubin)은 [증오의 기술](2007)에서 “‘나는 믿는다’는 말은 억압이다. ‘나는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다줄 공산주의를 믿는다’는 말하는 주체와 그 말을 듣는 타인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자신과 타인의 사고를 금하는 것이다. 사고는 주장의 근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명하고 의심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증거를 구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그것으로 충분히 절대적인 것이다....믿음과 환상이나 망상에는 아주 근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가지 모두 외부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욕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주 합리성을 초월한다. 프랑스 심리학자 장 프랑수와 마르미옹(Jean-Francois Marmion)은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2018)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교양 있고 비판 정신이 있는 사람도 비합리적인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사례는 놀랍기까지 하다.

아인슈타인이 다리를 저는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하려고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밀레바처럼 다리를 저는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라며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아내 밀레바의 병과 아들의 병에 관해 이렇게 썼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해버렸으니 벌을 받아 마땅해. 윤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열등한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은 것은 나의 죄야.”

이게 말이 되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하다니,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덕분에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의문 하나가 깔끔하게 풀린다. 평소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온 지식인이나 유명인사가, 내가 보기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걸 보고 놀란 게 한두번이 아니다. 왜 그랬을까? 이제 내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다. 그 사람은 ‘지식’이 아닌 ‘믿음’을 말한 것이었다! 지식과 믿음의 불화에 대해 오래 전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는 걸 새삼 음미하게 된다.

“믿음과 지식은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데, 이건 마치 늑대와 양이 한 우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여기서 지식은 이웃을 잡아 먹으려 으르대는 늑대이다. 지식은 믿음보다 더 뻣뻣한 옷감으로 짜여 있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충돌하면 지식은 딱 부러져 버린다.”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일부 독재자들이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지식’을 ‘믿음’으로 전환시킨 결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권력자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한 ‘지식’을 ‘믿음’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도 ‘믿음’의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은 “제발 나(우리)를 믿어달라”고 말해선 안된다. 권력 감시와 견제는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속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이나 집단이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신뢰를 쌓아가면 좋겠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