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버려라, 현재도 소중하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2023-05-15     강준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 106~43 BC)의 말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의 말이다.

“희망이 없다면 가슴은 무너져 내리리라.”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의 말이다. “희망이 없는 곳엔 노력도 없다.”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말이다. “무슨 일에서건 좌절하는 것보다는 희망을 갖는 게 더 낫다.”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말이다.

“모든 걸 다 잃었을지라도 미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 작가 크리스티앙 네스텔 보비(Christian Nestell Bovee, 1820~1904)의 말이다. “당신이 아래를 내려다보아서는 무지개를 발견하지 못한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의 말이다. “희망이 사라지면 곧 도덕적 타락이 뒤따른다.” 미국 작가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의 말이다. 

희망과 삶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은 유용하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칼 메닌거(Karl Menninger, 1893~1990)의 말이다.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靜態的) 요소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이다.” 미국 작가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의 말이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희망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의 말이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잔혹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우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을 본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의 말이다.

“희망은 뭔가가 잘 되리라는 확신이 아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게 옳다는 확실성이다.” 작가 출신으로 체코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1936~2011)의 말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시 기자회견에서 “당신은 낙관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오랜 침묵 후 이렇게 답했다.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믿는다는 의미의 낙관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못될 거라고 믿는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단지 희망을 가질 뿐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진전도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삶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이상 소개한 명언들은 흠 잡을 데 없이 다 좋은 말이다. 희망에 대해 비판적인 명언들도 많지만, 그런 명언보다는 희망을 긍정하는 명언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다음 말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희망은 마치 독수리의 눈빛과도 같다. 항상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희망 

모든 희망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아득히 먼 곳만을 바라보는 희망이라면 그건 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미국 신경심리학자 폴 페어솔(Paul Pearsall, 1942~2007)은 [역설의 심리학: 익숙한 인생의 가치와 결별하라](2005)에서 “희망을 버려라. 인생의 최악 시기에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소모적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적정 수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요청으로 볼 수 있다.

페어솔은 “최근 하버드와 UCLA 의대에서 실시한 연구들은, 희망이 질병을 치료하거나 암을 치유하는 데 효과적이진 않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가장 두려운 시기에도 ‘희망적’이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현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느낌들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암과의 투쟁을 통해 비관주의, 두려움, 분노, 공포가 희망만큼이나 정당하고 필수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마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현재 상황은 매우 끔찍하며, 당신이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더 나은 미래다’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말대로라면 현재는 전혀 살 만한 가치가 없으며 즐거움은 오직 미래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판타지 및 SF 작가 마거릿 와이스(Margaret Weis, 1948~)가 잘 지적했듯이, “희망은 현실의 부정이다.” 문제는 부정의 범위와 정도일 것이다. 모든 걸 전면 부정할 수도 있고, 일부나마 어느 정도 긍정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타협하는 자세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내와 고난의 시간을 감내하는 데에 더 유리한 건 아닐까? 도중에 무너지지 않으면서 희망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걸 좀 선정적으로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희망을 버려라, 현재도 소중하다”는 슬로건이 가능할 게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