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윤리는 얼굴에서 탄생했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며, 문화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말이다. 얼굴 표정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인류의 진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다윈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적인 조사들은 “문화적인 차이를 보이는 얼굴 표정들도 있지만 적어도 몇몇 감정들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말이다. 사회심리학자 대처 켈트너(Dacher Keltner)는 얼굴 붉힘이 누군가 무안함이나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다는 좋은 단서이며, 얼굴에 나타나는 수치심과 무안함은 사람들의 용서 본능을 자극한다고 했다.
얼굴 표정과 감정
“우리가 만나게 될 얼굴을 마주보기 위한 얼굴을 준비해야만 한다.” 영국 시인 T. S. 엘리어트(T. S. Eliot, 1888-1965)의 말이다. 그가 1915년에 발표한 첫 번째 시(詩)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한 구절을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애비너시 딕시트(Avinash K. Dixit)는 [전략의 탄생](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얼굴, 다시 말해 나의 행위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모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불리하게 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다. 때로는 그로 인해 심각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인간의 윤리는 얼굴의 존재에서 탄생했다.” 프랑스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말이다. 미국 사회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얼굴은 ‘나를 죽이지 말라’는 뜻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얼굴은 가련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인류학자 벵자맹 주아노(Benjamin Joinau)는 [얼굴: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2011)에서 “얼굴은 기본적으로 우리 몸에서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는 곳이며, 언제나 취약하다. 그리고 가장 심하게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점을 드러내며 내 앞에 놓인 이 벌거벗은 얼굴을 대할 때 나는 관대하다....얼굴의 표정은 특히 그 소유자의 인간성을 말해준다. 즉, 내가 그 소유자에 대한 연민을 찾을 수 있는 통로다. 이것이 바로 범죄자들이 잡혔을 경우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이유이며, 군인들이 눈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는 이유다.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를 죽이거나 형을 구형하는 일이 더 쉽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얼굴 표정은 진짜 감정을 나타내지 않을 때가 많다.” 미국 심리학자 폴 에크먼(Paul Ekman)이 [언마스크, 얼굴표정 읽는 기술](2003)에서 한 말이다. 그는 그런 표정을 가리켜 감정을 과장해서 연기하는 ‘모방표정(mock expressions)’이라고 했으며, 이와는 반대로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들은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미세표정(micro-expressions)’이라고 했다. “여성은 얼굴 표정을 읽는 데 더 뛰어난 반면, 남성은 군중 속에서 적대적인 얼굴을 포착하는 데 더 뛰어나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의 말이다.
”우리 얼굴은 나를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 몸의 유일한 골격근육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크레이그 스미스(Craig Smith)의 말이다. 프랑스 심리학자 마리안 라프랑스(Marianne LaFrance)가 [웃음의 심리학](2011)에서 “웃음이 그토록 강하게 또 매우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웃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며 인용한 말이다.
후안무치의 경쟁력
“사십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속설(俗說)이다. 이런 속설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은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바, 자기 성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는 욕망은 결핍에 대한 것, 결핍은 충족되면 욕망도 사라지기에, ‘불혹의 마흔살’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을 넘어 잔인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개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잃게 된다. 때문에 ‘늙을수록’ 결핍에 괴로우며, 그만큼 욕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십 불혹설’을 퍼뜨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성별과 계급 자원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어서 결핍의 고통을 덜 받는 ‘가진 자’거나, 자기 꿈을 좇기가 두려우니까 남의 꿈도 비웃는 비겁을 ‘집착 초월’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안전은 미신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혹당하면서, 자신을 가능성에 개방시키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도전에 매료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일 뿐 아니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렇다.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도사처럼 사는 것도 좋겠지만, 끊임없이 유혹 당하면서 사는 삶도 좋지 않을까? 그런 시도는 얼굴을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드는 우리의 오랜 습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인간의 윤리는 얼굴에서 탄생했다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얼굴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고야 말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온 말이 후안무치(厚顔無恥)다.
후안무치는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뜻인데, 그런 능력이 뛰어날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시인 최승호는 <방부제가 썩는 나라>라는 시(詩)에서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후안무치의 경쟁력에 대한 증언일지도 모르겠다. 부질없는 희망일망정 인간의 윤리가 얼굴에서 탄생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면 좋겠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