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정여립 동상'이 들어서고 '대동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3-04-06     신정일 객원기자

욕을 바가지로 먹었더니 밥을 안 먹어도 되겠다. '죽도 명승 지정 주민 설명회' 에서 내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 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곳이자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 중의 한 곳인 진안 죽도를 국가 명승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그냥 순수한 마음이 나를 욕 먹이게 한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재산권이 명승이 지정되면 침해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제대로가 아니고 어설프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절인가? 문화재청에서도 민간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하여, 문화재 지정구역을 최소한으로 지정하고 있다.

500m에서 200m, 100m, 어떤 경우는 50m까지 줄여서 지정하고 있는데 “그곳에 땅 한 평 없는 사람이 나서는 게 맞냐”고 하며, “지역사람이 아니면서 나선다”고 핀잔을 들었다.

무수한 말의 폭탄을 맞고서도 조금은 상기된 채로 설명을 마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이런 날이 어디 오늘 뿐인가? 오래전, 기축년 7월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 8시부터 KBS <세상의 아침> PD와 진안의 죽도에서 김제의 제비산까지 두루 헤매다 돌아왔다. 콜라 한 병으로 입가심을 하면서 겨우 일을 마친 후 오후 2시 쯤 그를 보내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회의에 회의를 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다 차 속에서 생각하니 아침밥도 못 먹고 욕만 배불리 먹은 하루였다.

“거기 누구여? 밭 밟는 사람이”

“예 정여립 때문에 서울에서 방송 촬영 차 왔습니다.”

“아니, 당신 여기 여러 번 왔던 사람 아녀? 뭐라고? 정여립? 서울 방송국에서 왔다고? 뭐 할라고 데려와, 당신 봄에도 관광버스 한 차 데리고 와서 밭을 밟았었지? 그때도 당신이 주선했지? 속 채려, 그런 일 주선하지 마, 될 일을 해야지, 죽은 최순식이도 여러 번 데려왔지만 안 되잖여?“ 

버럭 버럭 소리 지르며 삿대질까지 해대는 연로한 밭 주인, 행여 밭을 밟아서 농작물을 상하게 할까 봐 그러는 것이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한 두 번인가? 돈이 종교처럼 된 세상에 일당을 받기는커녕, 내 밥 먹고 칭찬은 그만 두고라도 이 욕 저욕, 욕만 배불리 먹으며 벌였던 일이 어디 이번 일 뿐인가?"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도 씁쓸하고도 쓸쓸한 것은 나이 탓일지 모르고, 내가 약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프랑스의 ‘가스통 바슐라르'의 글 한 편에 나오는 문구다.

“우리가 모든 것들로부터 내버림을 받았을 때, ‘쓸쓸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고통 스런 부재감(不在感. absencc)을 보상한다는 것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내버리지 않는 것을 기억한다는 일이다.(중략) 마음을 다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 현실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의 내 ‘마음 속’ 같은 마음을 <금회(襟懷)>라는 제목으로 노래한 사람이 있다. 연양 부원군 이귀(李貴)의 딸로 여승이 되었던 이씨(李氏)였다(이귀는 인조 반정의 주역이자 부안 현감 당시 부안 기생 이매창의 정인이었다.)

“시름과 시름이 이어 가나니 괴로운 속마음을 틔울 길 없네. 아득히 항상 바라보지만 알 수 없네, 너는 어디서 오는고.“

나는 언제쯤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벗이여, 도망쳐라,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니체가 충고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지, 달라지긴 했지. 완주 정여립 생가터에 <정여립 공원>이 만들어졌고, 혁신도시에 <정여립로>와 인후동에 <정인신로> 그리고 전주 시청으로 가는 길이 <대동길>이 들어섰지 않은가?

이렇게 욕을 먹고 ‘쓸쓸한 풍경’을 사랑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정여립의 동상이 들어서고, 대동세상이 오기는 오지 않겠는가.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