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산천, 걸쭉한 인물, 풍부한 토산, 아름다운 풍속, 기이한 발자취... 모두 다 갖춘 안동의 지세

신정일의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2020-04-20     신정일 객원기자
천등산 자락 명옥대

열자는 말한다. “산책을 하되 완전하게 하라. 완전한 산책자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바라본다.… 나는 네게 어떠한 산책도 금하지 않지만, 완전한 산책을 할 것을 충고한다.”

열자는 산책에서 관찰하는 기쁨을 찾지 않고 명상하는 기쁨을 찾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라보는 것에서 기쁨을 찾지만 그는 정신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았다. 바쁘게 혹은 이 악물고 정복하기 위해서 오르는 산만이 아니고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바람결을 따라 나서는듯한 산책처럼 산을 오른다면 그 역시 또 다른 아름다운 산행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완전한 산책 처 같은 산행을 위해 예비 된 산이 안동의 천등산이라면 과찬일까?

17세기 초에 안동의 지리지 <영가지>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의 지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쭉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가 이곳에 있다.”

멀리로 태백, 소백의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흐르고, 낙동강의 물줄기가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천등산은 안동의 서쪽에 있으며, 그 산에는 봉정사, 개목사 같은 고색창연한 옛 절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자락에 봉정사가 있다

천등산(575m)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소나무와 잡목들이 울창하고 산세가 온화하며, 수려하다.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접어들면 숲길은 아늑하고 계곡 물소리가 제법 요란한 좌측에 정자가 한 채 있다. 퇴계 이황이 이 봉정사에 묵으면서 공부하다가 자주 나가 쉬었다는 정자의 옛 이름은 낙수대였다. 밋밋한 그 이름을 퇴계는 정자에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명옥대로 바꾸었고, 이황은 훗날 이곳을 생각하며 시 몇 편을 남겼다.

여기에서 노닐던 지 벌써 오십년 세월,

젊은 시절 봄날에 수많은 꽃에 취했었지.

손잡고 놀던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옛날처럼 푸른 바위에 흰 폭포만 매달렸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멎기도 전에 「천등산 봉정사」라고 쓰여 진 일주문에 들어서고 나무숲이 우거진 길을 계속 올라가면 봉정사가 나타난다.

빼어난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숨어있는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鳳停寺)는 의상이 세운 절로서 창건설화는 이렇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냈는데 종이로 만든 봉황새가 앉은 이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고 이름 지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의상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혀 걸었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고 지었다 한다.

창건이후의 확실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한국전쟁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리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화마을과 이곳 봉정사를 찾았고 그때부터 이절은 입장료를 받게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봉정사

이 절에는 고려 때 지은 극락전(국보15호)과 더불어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과 조선후기 건축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왔기 때문에 건축박물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나무숲 길을 걸어가면 돌계단에 이른다. 한 발 두 발 숨이 가쁘게 올라가면 봉정사의 강당인 덕회루 밑으로 지나게 된다. 마치 부석사의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석등 앞으로 올라가듯이 그 문을 들어서면 석축이 나타나고 대웅전을 중앙에 두고 요사채와 화엄강당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 좌측으로 같은 위치, 같은 높이에 극락전이 고금당과 함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으로 나라 안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해제 보수하는 과정에서 였다.

중도리에 흠을 파고 기문장처(기록이 들어있는 곳)이라고 표시한 곳을 열어보자 극락전의 상량문이 들어있었고 그 상량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동 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산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년)에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이 상량문이 밝혀짐으로서 그때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알려졌던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건했는데 봉정사의 극락전은 그보다 13년이나 앞선 1363년에 중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년이라는 년대의 차이보다 봉정사 극락전은 대체로 고구려식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락전은 1972년의 해체와 복원공사 때에 금, 은, 구리의 옛날식 삼색 단청이 지워져 버렸고, 그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귀중한 벽화가 뜯겨 포장된 채로 내버려져 옛 맛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며 법당으로서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필요한 구조만 있지 장식이 거의 없는 고려중기의 단아한 건물이며, 바닥에는 검은 전 돌을 깔았다.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보수 할 때에 대웅전․화엄강당․고금당이 새집같이 지어져서 몇 백 년을 세월 속에 묵어온 온갖 풍상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다.

지금은 요사채로 쓰이는 고금당

봉정사 툇마루

극락전 앞에는 아담하면서 새까만 석탑이 있으며 극락전(보물449호) 우측에 고금당이 있다. 고금당은 이름 그대로 옛 금당이었고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봉정사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고금당 앞쪽에 화엄강당이 서있다. 한때는 강당으로 쓰였을 이곳 역시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주심포식 맞배지붕이다.

화엄강당 좌측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1625년과 1809년에 대대적인 손질을 거친 대웅전은 앞이 열려있는 일반적인 건물들과는 다르게 건물 앞쪽에 조선시대 양반집에 사랑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처음 볼 때는 어색해 보이지만 볼수록 정감이 간다. 대웅전에는 가운데에 석가모니불과 양쪽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는데 그 뒤편의 후불벽화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후불벽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낼 때 발견된 이 벽화는 4m가 넘는 거대한 벽화로 강진의 무위사의 벽화보다 앞서는 조선초기의 벽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1882년(고종 19년)에 새로 입힌 대웅전의 단청은 고려시대 단청의 요소를 지니고 있어 회화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고 특히 본존불을 모신 수미단 천장부에 그려진 문양은 발가락이 5개로 조선기대 초기에 사대주의의 영향을 받기 전의 그림으로 주목 받고 있는 그림이다. 그 이유는 조선 이후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발가락이 5개, 임금은 4개, 왕세자는 3개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대웅전에서 전면에 보이는 누각이 덕회루의 누마루다. 법고와 목어 사이로 봉정사의 오랜 역사를 적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나는 스님들이 머무는 무량해회(無量海會)라는 요사채를 돌아 영산암으로 향한다. 원래에는 천등산에서 흐르는 골짜기 그대로가 길이던 것이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촬영되고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골짜기를 메우고 계단을 만들었다.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89년에 네 개의 해외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 특별상을 받아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서 늙고 어린 승려 3명의 구도적 삶을 담고 있다. 투철한 수행으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선사 해곡이 “사방이 몹시도 어두우니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갈 길을 비추어라”고 어둠 속에서 석등의 심지를 돋우던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면이다.

지조암과 더불어 봉정사에 딸린 암자중의 하나인 영산암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의 집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루의 작은 문을 지나 영산암의 마당에 들어서면 큰 바위 곁에 잘 드리워진 소나무가 한그루 있고 목백일홍 나무와 여러 가지의 나무들이 요사채, 삼성각, 응진전 등 다섯 채의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지난날 봉정사의 스님들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절 영산암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 나는 하얀 고무신 두 켤레가 놓인 요사채 마루에 기대 앉아 세상에 찌든 내 마음을 풀어 놓는다. 풀어진 내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숲길은 눅눅하다. 간간이 붉고 하얀 버섯들이 피어 있고 골짜기에서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길은 이리저리로 뻗는다. 아무래도 이 길이 개목사 가는 길은 아닐 듯싶다. 이러다가 정상을 못 가는 것이 아닌지 계곡을 벗어나자 멀리 산들이 보인다. 바라보면 구름에 휩싸여 안동의 하늘은 어둡고 푸르른 산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소나무 숲이 제법 울창한 곳을 지나자 누군가의 무덤이다. 배낭을 벗는다. 바람 한 점 없다. 아무것도 흔들리는 것은 없다. 새파랗게 새순이 돋아난 솔잎도 싸리나무도 연푸른 억새 잎도 한없이 바람을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는다. 오직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 뿐이다.

얼마만큼 올라가야 정상에 오르고 어디로 내려가야 개목사에 닿을 것인가. 기다릴 줄 모르는 내 마음을 다독거리며 한참을 올라서 575m 천등산의 삼각점 앞에 선다. 나뭇가지 사이로 학가산이 구름 머금은 채 모습을 드러내고 내가 디디고 선 이 천등산으로 밀려오는 구름 건너로 안동의 산들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 금세 몰려온 구름은 온 세상을 덮고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은 몇 그루의 소나무와 잡목 그리고 같이 온 일행들. 나는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불현듯이 외롭고 그 외로움으로 소리를 지른다. 아! 그 소리가 퍼져 나가서 메아리로 되돌아 온 것일까? 산 아래 마을에서 들려오는 컹컹 울부짖는 개 울음소리.

나는 다시 이 산정에서 열자의 말과 같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고 싶었다.

“나는 마침내 동쪽으로, 서쪽으로, 또 모든 방향으로 바람결에 실려 가는 낙엽처럼 나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인지(내가 객체인지), 내가 바람을 타는 것인지(내가 주체인지)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났다. … 그 이후 자연과의 일치에서 오는 희열을 느끼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굶주리고 어려운 자연에의 회귀라는 단련을 거쳐야만 했던가…”

나 역시 열자처럼 나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고민으로 수없이 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웠었고 수없이 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했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도(道)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도(道)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중국 도교의 대가인 ‘로이 칭 옌’이 말이 들어맞는 것처럼.

그러한 과정 속에 내가 불현 듯 깨닫고자 했던 그 단순성(단순성을 진리라고 말하는 이 무엄함을 용서하소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 단순성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나 자신을 못 견디게 하는 가를 깨달았었다. 그래서 나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싸우는 것처럼 살아가고 말로는 “노는 것처럼 일하고 일하는 것처럼 논다.”면서 나는 얼마나 나 자신에 지쳐가고 있었던가? 진실로 좀 더 단순해지고 그리고 좀 더 느슨해지자. 문득 한조각 손수건만한 크기로 구름이 걷히고 학가산의 한쪽이 건너다보이며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진실로 좀 더 단순해지고, 좀 더 느슨해지자

안동 병산서원

스피노자의 말처럼 즐거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증오하지도 말자, 그리고 내가 처음 나 자신과 약속했던 것처럼 나 자신에 가혹해지고 타인에게 관대해지자.

내려가는 길에 의상스님이 도를 닦았던 큰 바위와 그나마 남아있는 개목산성을 찾고자 했으나 구름 속에 어느 것도 찾지 못하고 20여분쯤 내려오니 개목사(開目寺)다.

넓게 펼쳐진 인삼밭 너머로 부끄러운 듯 살며시 몸을 드러내는 개목사는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재미있다. 의상이 출가하여 천등산의 정상근처에 큰 바위 밑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을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되었다. 의상은 지금의 터에 99칸의 절을 창건하고 “하늘의 등으로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고려 말에는 포은(包銀) 정몽주가 이 절에서 공부를 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동부사로 와 있던 맹사성이 중수하였다. 그 무렵 안동지역엔 유난히도 장님이 많아 맹사성은 이 절 이름을 「개목사」라고 지으면 장님이 더 이상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뒤부터 안동지역에 장님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가 공부한 절

의상이 지을 때 99칸이었다는 전설과는 다르게 현존하는 당우는 법당인 원통전과 요사채 그리고 문을 겸한 종루가 있을 뿐이다. 허물어져 가는 농촌의 빈집이나 여염집 같은 문루를 지나자 한 갖지게 서 있는 원통전(보불 242호)이 보인다. 마당에 피어난 온갖 꽃들에 눈을 빼앗기고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허물어질 듯싶은 요사 채에서 노스님이 나오시고 그 옆방에선 나이 드신 보살님이 나물을 다듬고 있다. 나라 안에 수많은 절집들을 두루 찾아다녔어도 이절의 요사 채 처럼 퇴락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런닝 바람에 노스님은 물이 약수니 물을 마시고 원통전을 구경하란다.

소박하지만 마음에 끌리는 원통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주식포식 맛배지붕이다. 건물전면에 퇴칸을 놓고 마루를 깐점이 독특한데 옆에서 보면 지붕 앞쪽의 처마가 다소 무거워 보인다. 앞뒤의 높이가 비 대칭이기 때문에 주두부터 시작되는 일반적인 주심포와 달리 허점차에서 부터 보아지가 튀어나와 퇴보와 중도리를 받도록 하며 특별히 고안한 공포구성이 특이한 조선 초기의 건물인 원통전을 보고 나오자. 이곳 서후면 태생이라는 윤경스님이 요즈음 스님들의 세태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신다. 요즘 중들은 “마음을 가지고 중질을 해야 하는데 옷을 가지고 중질을 한다.”고 그러나 어디 그게 사찰뿐인가. 온 나라 구석구석 썩지 않은 물 하나도 없고 나만 무사하면 세상이 다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사람들로 온 세상이 넘쳐나는데.

스님이 건네주시는 떡을 나누어 먹고 동행했던 김현준 기자는 스님에게 싸가지고 온 오이 한 뭉치를 내놓는다. ‘주고받음이 이와 같아라’ 알고 보면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나무도 풀도 돌멩이도 보이지 않는 바람들도 사람들도 저마다 영혼이 있고, 또 역시 다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언젠가 다시 오겠노라는 기약 없는 인사를 나누고 절을 나오자 윤경스님도 따라 나오시면서 “먼 길 조심해서 가시고 좋은 일만 계속되라.”는 덕담까지 던져주신다. 푸르른 은행나무 사이로 안동 시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개목사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길은 장마로 인하여 조금씩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산책길처럼 부드럽다.

봉정사 영산암에 다시 들러 내 집처럼 편안하게 앉는다. 봉정사 뒤편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고 난다. 이젠 내려가야지. 덕회루를 지나 봉정사에 작별을 고하고 답사여정은 안동의 병산서원으로 향한다. 나라 안에 있는 수백여 개의 서원들을 떠올리다보면 불현 듯 생각나고 가고 싶은 서원이 하나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과 그의 아들 유전을 모신 서원이다. 낙동강의 물도리가 크게 S자를 그리며 병산을 지나 하회로 흐르는 것을 뒤로 하고 병산서원으로 들어선다.

유홍준 선생이 이야기한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사의 백미이고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에서도 최고”의 건축물들이 병산서원이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에 올라 만대루 넘어 병산(옛 지도에 청천절벽인데, 그 뜻은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 이라는 뜻이다)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물을 바라보고 만대루에 오른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으로 시원스럽게 열려진 만대루에 오르면 내 마음도 역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한조각의 뜬구름이 되고, 더러는 흐르고 흘러가는 낙동강물이 되기도 하며, 유유히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기도 한다. 한 숨 푹 자고 막걸리 한 잔을 천천히 들여 마시고 쉬어가야지. 그 바람은 항상 마음뿐이다. 돌아갈 길은 언제나 아득하고 마음은 돌아갈 길만큼이나 바쁘다. 흐르는 낙동강에 고적한 영산암의 툇마루에 내 마음을 던져두고 귀로에 오르며 시인 안도현의 시「다시 낙동강」한 편을 떠올렸다.

다시 낙동강

아우야

우리가 흰 모래밭 사금파리 반짝이는 소년이었을 때

앞서거니 뒷서거니 땅으로만 기어 흐르던 낙동강이

오늘은 저무는 경상도 하늘 한 끝을 적시며 흐르는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로

강물이 하나의 회초리 라는 것을

우리 어린 종아리 감기던 아버지 싸리나무 푸른 매

강물도 하구 부근에서 들판의 종아리를 때리며 가는구나

아우야

아버지 수십년 삽질로도 퍼내지 못한 낙동강이

아직 철들지 않은 물고기를 하류로 풀어 보내며

조심하여라 조심하여라 웅얼대는 소리 듣느냐

아버지 등줄기에 흐르던 강물 보았느냐

그 속을 거슬러올라와 헤엄치던 어린 날 우리는

그렇지 한마리씩의 빛나는 은어였을 것이다

먼 훗날

다시 낙동강에 나갈 때 아우야

강물이 스스로 깊어진 만큼 우리도

나이가 부그럽지 않고 서글프지 않은 물줄기 이루었을까

저무는 강가에 아버지가 되어

푸른 매가 되어 돌아와 설 수 있을까

아우야

/<사람과 언론> 제2호(2018 가을)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