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계급 구조를 위한 ‘선전기관’인가?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세상에는 똑같은 두 개의 의견, 두 개의 머리카락, 또는 두 개의 알곡이 결코 없었다. 가장 보편적인 특징은 다양성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의 말이다.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유럽을 유럽답게 만든 요인, 그것은 바로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말이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동체는 중도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미국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 1954~)이 [인포토피아(Infotopia)](2006)에서 한 말이다. 즉 자연스럽게 평균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반면 동질적이고 비슷한 생각으로 뭉친 공동체는 극단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여러가지 맥락에서 사람들의 견해는 확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극단성을 띠는데, 내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감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혁신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약할수록 진정한 자기 인식 능력도 떨어진다.” 미국 철학자이자 인지 이론 전문가인 마이클 린치(Michael P. Lynch)가 [근시사회](2014)의 저자인 폴 로버츠(Paul Roberts)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린치는 자신을 제대로 아는 건 물론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우리에겐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양성이 긍정적 평가만 받은 건 아니다. “다양성의 중시는 인간의 이기주의를 부추겼다. 특히, 정치와 사회의 장에서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쓸데없는 집단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철학자 아서 러브조이(Arthur O. Lovejoy, 1873~1962)가 [존재의 거대한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1936)에서 한 말이다. 그는 당시 개별성과 다양성을 찬양하는 새로운 흐름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런 흐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 이런 경고를 했다. 이 말은 훗날 다양성의 가치에 의구심을 보내는 사람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었다.
다양성은 도시계획 비평가들과 개발업자들 간의 해묵은 논쟁 주제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1943~)은 [무질서의 효용: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197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발업자들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들’과 살기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대꾸한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든 사회적인 이유에서든 간에 다양성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결핍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들의 욕망은 기능적으로 분리되고, 내적으로 균일한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영국의 행동과학자 제커 덴렐(Jecker Denrell)은 다양성이 너무 두드러지면 혁신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면서 많은 사례를 증거로 제시했다. 실제로 성공한 혁신 사례를 보면 다양하게 구성된 팀원들의 공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눈에 띄는 성공을 이루지 못해도 동질성이 강한 팀이 항상 안정적인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유정식은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2007)에서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시각 변화는 분명 긍정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잘못된 인식의 틀을 갖게 만든다는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부작용이란 다양한 것은 선(善)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이 많은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뿌리내려 있으며 다양성을 확대하기 위한 사회적인 조치를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위적이고 맹목적인 조치를 단행하는 것은 조직에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획일성을 낳기도 한다는 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승자독식 계급 구조
그런가하면 다양성의 장단점을 논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다양성 제고를 위한 정책은 늘 뜨거운 논쟁과 논란을 불러 일으키지만, 시늉에 불과한 걸 놓고 왜 그리 호들갑을 떠드느냐고 냉소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미국 비평가 월터 벤 마이클스(Walter Benn Michaels, 1948~)는 [다양성의 문제(The Trouble with Diversity)](2006)에서, 소수집단 우대정책 혹은 장학금 제도의 실질적인 목표는 대학에 지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의 대학은 계급 구조를 위한 ‘선전기관’이라며 이렇게 주장했다. “하버드대학에 다니는 극소수의 가난한 학생들의 역할은 대다수의 돈 많은 학생들에게 ‘하버드로 가는 길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정치엔 다양성이 전혀 없는데, 왜 그런 정치를 그대로 방치한 채 다양성 논쟁을 벌이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다.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Matt Taibbi)는 [우리는 증오를 팝니다](2019)에서 “주요 뉴스 방송사에서 말하는 ‘지적 다양성’이란 ‘양당의 누군가’를 의미한다”고 했는데, 겨우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선택지를 두고 다양성 운운하는 게 낯 뜨겁지 않느냐는 항변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들이 참전하는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치가 다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자가 될 수 있는 ‘윈윈 게임’이 가능하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금력과 권력 중심의 획일화된 서열 체제에서 승자가 독식하는 ‘제로섬게임’에만 미쳐 있다. 이 기본 구조를 고수하면서 외치고 실천하는 다양성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대학은 기존 계급 구조를 지키기 위한 ‘선전기관’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치를 다양화하는 건 제도나 정책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의식혁명을 필요로 한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