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아사리판에서도 정치적 욕심 때문에 미사일 쏘며 ‘내전’...튀르키예 대통령 불난 집에 기름 붓기도, 남 일 아냐”

[이영광 기자, 온몸으로 묻는다] KBS 1TV ‘시사 직격’ 정용재 PD

2023-03-01     이영광 기자

현지 시각으로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강도 7.8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번 지진으로 5만 명 넘게 사망했다. 여전히 여진의 공포 속에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 튀르키예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지난 2월 17일 KBS 1TV <시사 직격>에서는 '사투(死鬪),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편이 방송되었다. KBS PD가 직접 튀르키예 현지를 찾아 지진 발생 후 어떤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지 생생한 모습을 담았다. 취재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2월 22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튀르키예에 다녀온 정용재 PD를 만났다.

“만약 비행기 내리는데 기사 없으면 공항에 붙들릴 수도...다행히 현지 코디 덕분에 세팅”

정용재 KBS PD

- 지난 17일 방송된 KBS 1TV <시사 직격> ‘사투(死鬪),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편 연출 하셨잖아요. 해외 취재라서 힘들었을 것 같은 데 끝낸 소회가 어떠세요?

“가기 전에 너무 걱정 많이 했어요. 두 가지 걱정이었는데요. 하나는 일단 가서 안전상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죠. 여진도 계속 난다고 하고 건물 무너지는 영상들 많이 보고 갔거든요, 또 하나는 되게 짧은 시간 동안 취재해서 방송 제작해야 했던 일정이었기 때문에 그걸 잘 할 수 있을까였어요. 두 가지 걱정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 막상 가니까 너무 현장 자체가 잔혹해서 그걸 보는 게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그분들이 저를 보고 안으실 때 따뜻하면서도 되게 차가운 손길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고 좀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 이 아이템은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죠?

“약간 반반이었어요. 사실 저는 지금 빠졌지만, 3월 10일에 방송할 부동산 아이템 팀에 처음부터 붙어서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희 팀장님이 저에게 튀르키예 가는 비행기 티켓과 현지 코디 알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전 알아만 보는 줄 알았어요. 그때 전 내심 내가 가나 했죠. 원래 다른 선배님 두 분이 가는 걸로 가닥이 잡혀서 내심 ‘아 나도 가고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마침 제가 가라고 팀장이 결정을 해줬고 사람이 간사한 게 그때부턴 괜히 엄청 걱정이 되더라고요. 저는 해외 출장이 처음이거든요. 게다가 이런 재난 취재는 국내에서도 해본 적 없었어요.”

- 아무래도 여진이 계속 있으니 더 무서웠을 것 같아요.

“여진이 저 있는 동안 계속 있었고 포항 지진 정도의 규모가 하루에 한 네다섯 번씩은 느꼈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찍어야 될 게 많고 인터뷰해야 될 것도 많아서 그걸로 온갖 정신이 다 차 있으니까 여진이 엄청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나가기 전에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나간 게 수요일 저녁이었는데 화요일 저녁에 가기로 결정나서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일단 현지에 통역 가능한 분 두 분 알아보고 저와 같이 간 전혜란 선배 스케줄 보고요. 또 운전해 주시는 기사님과 차 각각 두 개씩 하고 그다음에 숙소가 있는지 비행기 있는지 그런 것들을 다 전날에 다 알아봤죠. 근데 튀르키예의 가지안테프 지역을 다들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원래도 거긴 시리아와 국경 맞닿아 있고 내전도 있어서 위험한 지역이거든요. 저희가 비행기를 탄 순간까지도 기사님이 없었어요. 저기 도착할 때쯤 기사님이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정말 막연한 기대였죠. 만약에 비행기 내리는데 기사님이 없으면 저희는 공항에 붙들릴 수도 있었죠. 다행히 거기 현지에 계신 코디님이 워낙 잘해주셔서 모든 게 세팅이 됐죠.”

- 처음에 지진 보도는 어떻게 보셨어요?

“그때 저는 사실 제 부동산 아이템 하고 있었어요. ‘튀르키예 7.8 진도의 지진 발생’이라는 속보 떠서 그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사실 지진 영상도 제가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못 봤어요. 부동산 아이템 관련 사례자 찾는 데 잘 안 구해져서 다른 뉴스는 아예 안 받거든요.”

- 가기로 하고 영상 본 건데 어땠어요?

“가야한다는 생각에 엄청 심란했죠.”

- 대지진 현장을 가셨잖아요. 처음 가셨을 때 어떠셨어요?

“이스탄불에 내렸을 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고 거기서 원래 비행기 타고 가야 되는데 비행기가 다 마비 된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가는 데 20시간이 걸렸어요. 둘째 날 취재하려고 카라만마라슈에 갔어요. 가는 도중엔 건물이 다 멀쩡한 거예요. 하지만 가까이 가니 슬슬 무너진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이들 무너진 건물 밑에서 술래잡기...우리나라 놀이터 애들과 똑같이, 그게 더 슬프더라고요”

2월 17일 방송된 KBS 1TV '시사 직격'의 '사투(死鬪),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한 장면(캡처)

- 그럼, 카라만마라슈 외곽은 안 무너졌나요?

“그 지역만 무너졌고 외곽은 안 무너졌어요. 근데 그 지역이 남한만 한 땅인 거죠. 우리나라 치면 남한 전체 건물이 다 무너졌다고 보면 됩니다.”

- 카라만마라슈는 건물에서 파편이 계속 떨어지는 거 같던데.

“제가 있을 때도 그 기울어진 건물에서 돌 잔해가 계속 떨어졌어요. 그래서 되게 위험했죠. 방송 보셨겠지만 제가 건물 쪽을 걷고 있으니까 가운데로 걸으라고 하잖아요, 그게 맞는 말이죠. 저는 모르니까 겁도 없이 걸었던 건데 다행히 제가 있을 때 저한테 건물 파편이 쏟아지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늘 조심하려고 했었죠.”

- 거기 분위기는 어떤가요?

“분위기는 참담하고요. 되게 가슴이 아픈데 가슴이 아픈 이유는 도시 전체가 울고 있거나 모두가 표정이 안 좋고, 낙담해 있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가면 되게 화기애애 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무너진 건물 밑에서 술래잡기해요. 우리나라 놀이터 가면 있는 애들과 똑같이 놀고 있어요. 저는 그게 더 슬프더라고요. 그 도시의 너무 큰 재앙이고 너무 큰 비극인데 이걸 완전히 100%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 튀르키예는 지진이 자주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영향도 있을까요? 무슨 말이냐면 ‘지진 났네. 많이 죽었구나. 그래도 나에게 피해 없으면 다행이지. 빨리 복구되면 좋겠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죠. 지진은 중간중간 일어나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이 죽은 적은 없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그 지역에서 지진이 난 적도 거의 없아요. 원래는 1999년 이스탄불 쪽에서 지진이 자주 났었죠. 그때도 지금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어요. 사실 이스탄불은 대도시고 거기는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내진 설계가 돼 있는 건물도 많은데 여기는 낙후 지역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인명 피해가 엄청 커진 거죠. 그래서 일상적인 건 절대 아니었어요.”

- 이재민이 텐트에서 지내는 것 같던데 나라가 지원한 건가요?

“AFAD라고 텐트에 쓰여 있는 거 있잖아요. 재난관리위원회라는 데인데 거기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텐트를 지어줬어요. 그래서 거기 안에서 살긴 사는데 사실 텐트 안에 못 들어가는 분들도 많아요.”

- 텐트에 들어가는 건 추첨인가요?

“우선순위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일단은 가족이 많고 아이들이 많고 또 여성이고 더 사회적 약자들 육체적인 약자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먼저 들어가는 걸로 아는데 저도 정확하진 않아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안 들어가겠다고 해요. 왜냐하면 그 텐트촌이 어디나 있는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기자님 같은 경우 전주에 사는데 텐트촌이 일산에 있어요. 그러면 차라리 그냥 나는 내 집 옆에 내 텐트 짓고 살겠다고 하죠, 굳이 일산까지 올라와서 안 할 거잖아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난방도 안 들어오는 텐트...체온으로 버텨야”

- 튀르키예 날씨 춥다던데 텐트는 엄청 추울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건조하게 춥잖아요. 거기는 습하게 추워요. 말하자면 습도가 높으니까 찬물에 몸 담근 느낌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추위와 또 다른 추위고 또 일교차가 엄청 커요. 저희도 취재할 때 낮에는 더워서 상의 하나만 입고 다니다가 밤 되면 너무 추워서 패딩 입어요. 밤이 되면 엄청 춥죠. 그러나 텐트 안에 아무것도 없거든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난방도 안 들어오죠. 그냥 텐트예요. 그럼 체온으로 버텨야 해요.”

- 안타까운 사연도 많을 거 같아요? 

“A란 사람이 있어요. A에겐 형이 있어요. 형이 아버지 병간호를 병원에 갔다가 그 병원이 무너져서 죽은 거예요. 근데 지진 난 다음 날이 아버지 퇴원 날이었대요. 그러니까 하루만 더 늦게 나왔거나 아니면 이분이 하루만 더 빨리 나오셨으면 모두가 살 수 있었는데 아버지랑 형이 다 죽은 거예요. 형한테는 딸이 있어요. A에겐 조카죠. 조카를 데리고 형을 묻었대요. 하지만 조카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무덤 만지면서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날이 그 딸의 생일이었어요. 즉 이 여자아이는 평생 자기 생일날 아버지가 생각나겠죠.”

- 시리아는 취재가 불가능한가요?

“시리아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보시다시피 국경이 다 내전 때문에 막혀 있는 상황이었고 유엔의 제재를 받는 상황이라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

- 시리아가 대지진이 있은 후에도 내전을 한다는 게 잘 이해 안 가요.

“거의 11년째 지금 하고 있는데 지진이 난 이 아사리판에서도 정치적인 인간의 욕심이라든지 이런 것까지 지진이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지진 난 상황에서도 막 미사일 쏘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부정부패·부실 공사, 피해 더 키워...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

- 아파트 부실 공사가 피해를 키운 걸까요?

“그렇다고 전문가들이 많이 얘기해요. 그리고 실제로 가서 보면 건물이 건축학적으로 아무리 지진이 흔들려도 기둥 철근 이런 것들은 똑바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너져도 기둥은 남아 있는데요. 근데 그게 마치 무슨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킨 것처럼 무너지죠. 튀르키예가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보다 그 지진과 관련해서 건축 규제가 훨씬 심해요. 왜냐면 지진 지대다 보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엄격해요.

문제는 아무도 지키지 않아요. 가지안테프나 카라만마라슈 쪽은 동생 문화가 되게 강한 곳이래요. 예를 들어 내가 건물을 짓고 싶은데 비용을 최대한 싸게 해야 돼요. 철근을 10개 넣어야 되는데 10개 넣으면 너무 비싸니 3개만 넣고 싶어요. 그럼 지어놓고 거기서 검사 니오잖아요. 그러면 ‘형 왜 그래. 이따 술 한잔하자’라면 알았다는 식으로 넘어가요. 그러니까 부정부패를 공직자가 눈감아주고 있는 규제를 집행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되게 심하다고 들었어요.”

-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응을 못해서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도 있던데.

“그렇죠. 그러니까 저희도 가서 보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지진이 일어난 지 3일째 4일째가 돼도 아무도 오지 않더라죠, 근데 안에 사람들 깔려 있잖아요. 그래서 직접 시민들이 위험한 곳을 막 손으로 흙 파내고 있어요. 이런 경우가 거의 4, 5일째까지 현장의 풍경이었어요. 근데 에르도안도 와서 연설도 하고 구호물자도 보내고 텐트도 지어주고 이런 건데 정말 3 4일 동안 국가는 부재했다고 시민들이 많이 얘기했어요.”

- 에르도안 대통령이 막을 수 없었다고 해서 국민의 화를 키운 것 같던데.

“그 말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죠. 사실 대비할 수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에르진은 하나도 안 무너졌어요. 왜냐하면 건축업자들이 와서 ‘형 왜 그래’라고 하면 시장은 ‘내가 왜 네 형이야’라고 하면서 다 막은 거죠. 그렇게 지은 건물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대통령이 지금 장기 집권하고 있잖아요. 대통령이 취임한 지 몇 달 안 됐으면 어떻게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 2003년부터 집권을 하고 있는데 정부 수반이 그런 거 다 살폈어야죠. 못 살폈을 수도 있죠. 와서 그러면 ‘제 불찰입니다’라고 사과하든 아니면 그 이후 대책이라도 제대로 마련해야죠, 그런데 그런 거 없이 ‘이건 누가 와도 못 막았다’라고 하면 국민들은 화날 수밖에 없는 거죠.”

-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을까요?

“제가 사실 재난 지역 취재를 처음 가봤고 이게 또 그냥 재난도 아니고 전 세계의 취재진이 다 와야 했던 진짜 대지진의 현장에 가보니 결국에 자연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판과 판이 만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잖아요. 그럼 그거에 늘 대비해야겠다는 거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영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