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3-02-24     신정일 객원기자

내 사는 집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오래도록 집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꼈을 것이다. 집이 집 같지 않고 낯설어질 때, 문을 열기가 두려워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무도 없는 방.

싸늘한 냉기가 들어서는 나를 손님처럼 아니 이방인처럼 맞을 때, 그런 때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렇다. 서울에서 저녁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겪을 수밖에 없는 나그네의 숙명, 그 때의 낯설음을 카프카는 <귀가(歸家)>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대청을 지나 주위를 둘러본다. 내 아버지의 해묵은 뜨락이다. 한 가운데 작은 웅덩이. 쓸 수 없는 낡은 가구 등이 잡동사니로 나 뒹굴어져 다락방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는 길을 바꾸어 놓고 있다. 고양이가 난간 위에 도사리고 있다. 언제던가 노느라고 막대기에 매어 놓은 찢어진 수간 하나가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다. 내가 돌아왔다. 누가 나를 맞아줄 것인가? 누가 부엌 문 뒤에서 기다리는가?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저녁 식사 때 마실 커피가 끓여지고 있다.

그대는 아늑한가, 집에 있는 양 느껴지는가? 모르겠다. 지극히 애매하다. 내 아버지의 집이기는 하지마는 물건 하나하나가 내 쪽에서 더러 잊었기도 하고 더러 알았던 적이 없기도 한 그 나름의 용무에 골몰하고 있기라도 하듯 냉랭하게 서 있다. 내가 그것들에게 무슨 소용이 닿겠는가. 내가 그것들에게 무엇이겠는가. 내 비록 아버지의 늙은 농부의 아들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부엌 문을 두드릴 염두도 못 내고 그저 멀리서만 귀 기울이고 있다. 그저 멀리서만 선 채로 귀 기울이고 있다. 그렇지만 귀 기울이다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깜짝 놀랄 그럴 형세는 아니다. 

멀리서 귀 기울이고 있는 까닭에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오직 가벼운 괘종치는 소리 한 가닥을 듣거나, 아니 어쩌면 그저 듣는다고 믿는다. 저 유년의 나날에서 들려오는 시계 소리를, 그 밖의 부엌에서 일어난 일은 그들이 내게 감추는,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비밀이다. 문 앞에서 오래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그만큼 더 서먹해지는 법,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한테 무얼 묻기라도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나 역시도 자기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같지나 않을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와서 서성거리다 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평생을 무명으로 살다가 사후에 알려진 고독으로 점철된 위대한 작가인 카프카가 내게 다시 속삭인다.

“인간의 역사는 나그네의 두 발 사이에 있는 짧은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에 만나서 한 때를 살다가 가는 우리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