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루 '호석'과 문화 유전자
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99)
남원 광한루 완월정 뒷편 잔디밭에는 호석(虎石)이 하나 있다. 이곳은 광한루가 확장 되기전 시장통 삼거리였다. 남원성 밖 밤나무 시장 즉, 율장 삼거리에 호랑이 석상이 생겨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광한루 호석에서 나온 이야기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호석 앞의 돌에 새겨 놓은 설명문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구전인데 남원에 화재 방비와 견두산(犬頭山)의 나쁜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수지면 고평리 고정마을과 남원읍내에 호석상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호석의 이야기 세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이렇다.
첫 번째는 광한루가 확장되면서 완월정 뒷편 잔디밭이 된 지금의 자리에 있는 그 호랑이 석상을 설명한 안내석의 내용이고 이렇다.
"옛날 남원 고을 수지면 견두산에 떼를 지어 살고 있는 들개들이 한바탕 짖어댈 때마다 고을에 괴변이 일어났다 이에 이서구 전라감사가 견두산을 향하여 호석을 설치하였더니 재난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두 번째 구전은 이렇다.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 시절 남원에 와서 남원에 불이 많이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남원에 불이 자주 나는 이유는 견두산(犬頭山)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시장통 삼거리에 해태상을 세워 놓고, 산 이름을 개 견(犬)자를 써서 견두산으로 하라'는 말을 해서 원래 호두산(虎頭山)이었던 산 이름이 견두산으로 바뀌면서 그 뒤로부터 화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구전은 견두산(犬頭山)의 나쁜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수지면 고정리와 남원시장통 율장에 호석상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광한루 경내에 있는 호석이 가진 그 세가지 이야기에 빠지지 않은 공통점은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호석은 이서구 관찰사 때 생겨났다는 말이다.
이서구 관찰사는 누구인가? 전라관찰사 이서구(李書1754~1825)는 정조 18년(1794)과 순조 20년 (1820) 두 번에 걸쳐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풍수에 능했다는 전설이 호남지방에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풍수에 능했다고 하니 남원의 호석에서 나온 이야기도 풍수적 문화와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 1597년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후에 그려진 군사 지도인 남원 고지도에는 대두산으로 표기 되어 있고 1600년대 초의 고지도에는 견두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 이서구 관찰사가 태어나기 150여년 전부터 이미 대두산이거나 견두산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견두산과 호석에 이어져 있는 문화적 유전자의 비밀은 무엇일까?
1597년(정유년) 남원성을 침공한 왜군의 한 부대는 남원 숙성치를 넘어왔다. 숙성치와 지맥을 같이한 큰 산줄기는 남원으로 넘어오는 지리적 자연 방호산이었다. 그 산을 큰 호랑이 머리산이라고 불렀던 것은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이 울면 산에서 가장 무서운 큰 머리 가진 놈이 한 마리 내려온다'고 겁을 주었다고 하니 대두산은 호두산의 백성식 이름인 것이리라.
그 산에 남원으로 넘어오는 유일한 험로가 있었는데 정유년 왜군의 한 부대가 줄을 지어 그곳으로 넘어올 때 그 모습과 왜병들이 진군하면서 웅성대는 소리가 마치 굶주린 들개떼와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곧 남원성 전투의 재앙과 민가의 약탈 방화로 이어졌고 이 산이 왜군을 방비해 내지 못한 것은 지기가 쇠해졌기 때문이라는 풍수적 여론을 냈을 것이다.
남원성 전투가 끝나고 남원 사람들은 남원의 지리적 방호산이 그 기운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대두산의 이름을 왜구를 빗댄 견두산으로 바꾸고 그 들개 기운을 제압해내는 풍수적 문화의 일차 전방 방어지인 견두산 아래 수지 고평리와 최후 방어지인 남원성 밖 시장통에 들개의 천적 호랑이 석상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그로부터 백여년 쯤 흐른 뒤에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남원에 왔을 때 남원 백성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그 호석 이야기를 듣고 이 호석이 세워진 위치와 머리방향으로 보아 앞으로는 왜군이 절대로 남원을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후 호석에 이서구 관찰사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호석은 남원으로 침략해 넘어오는 왜군을 지켜내라는 염원을 호석에 들인 것이며 거기에 남원성 전투에서 목숨 바쳐 고을과 나라를 지켜낸 교훈을 상속 시켜가기를 바라는 남원 선조들의 문화관의 상징이리라. 천년고도 천 개의 이야기에는 고을의 품격과 자존을 냈던 선조들의 문화관이 들어 산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