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태양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다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낯선 사람을 친구와 동등하게 느낄 정도로 공감의 기울기가 평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20세기 최악의 유토피아적 이상과 다르지 않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1954~)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1)에서 한 말이다. 그는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는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가 더 나은 이상이라고 했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공감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지역이기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쪽으로 우리를 말고 간다. 공감은 근시안적이어서, 단기적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 1963~)이 [공감의 배신: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2016)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는 공감의 긍정적 효과를 꼽느라 바빠서 공감의 대가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며 이렇게 말한다.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이 선호하는 대의와 신념이 공감을 통해 강화되었다고 믿는 자연스러운 경향성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고 정당한 행동은 공감에 뿌리를 둔 것으로 생각하고, 쓸모없거나 잔인한 행동은 다른 데 뿌리를 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공감과 혐오
네덜란드 언론인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 1988~)은 [휴먼카인드: 감춰진 인간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2019)에서 “공감은 스포트라이트”라는 블룸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세상을 비추는 선한 태양이 아니다. 스포트라이트, 즉 집중 조명이다. 또한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골라내고, 당신이 그 한 줄기 빛에 가득 담긴 감정을 모두 빨아들이느라 바쁜 동안 나머지 세상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어 브레흐만은 “공감은 절망적으로 제한된 기술”이라는 블룸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감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 즉 우리가 냄새를 맡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밴드의 팬들, 그리고 아마도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 등에게.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의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학대당한 동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공감을 느낀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슬픈 배경 음악이 점점 크게 울리는 동안 주로 카메라가 확대하는 대상에게 공감을 느낀다.”
브레흐만은 블룸의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뉴스라는 현대의 현상과 꼭 닮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는 “공감이 특정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오도하는 것처럼 뉴스도 예외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속인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더 나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덜 용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해자와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 적에 대해 더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소수에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적의 관점은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강아지 전문가 브라이언 헤어가 이야기한, 우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하면서도 잔인한 종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슬픈 진실은 공감과 외국인 혐오증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과잉 공감의 위험
100년 전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은 뉴스를 ‘스포트라이트’ 대신 ‘서치라이트’로 비유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진실과 뉴스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했다. “뉴스의 기능은 사건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고 진실의 기능은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고 그 사실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키고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현실의 그림을 만드는 것이다.” 리프먼에 따르면, 언론은 사건을 하나씩 어둠에서 꺼내 빛을 밝히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탐조등(探照燈, Searchlight)의 빛과도 같은데, 사람들은 이 빛만으론 세상사를 다 알 수는 없다.
공감이 스포트라이트나 서치라이트라는 건 궁극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공감은 ‘선택적 과잉 공감’으로 빠지기 쉽다는 걸 의미한다. 과학철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1971~)은 [공감의 반경: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2022)에서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그만큼 외집단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하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보라. 그것은 선택적 과잉 공감이 빚어낸 것들이다. 초갈등 시대에 우리는 또다시 공감에게 SOS를 친다. 하지만 한쪽에 과잉 공감하는 순간 다른 쪽에는 폭력이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료제는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부족 본능이라는 공감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그 반경을 넓히는 일은 점점 더 어려운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포트라이트나 서치라이트에 과잉 공감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공감을 아예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과잉 공감의 위험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편애(偏愛)는 불가피하며 바람직하기도 하다. 다만 편애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굴 것 까지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시야가 스포트라이트나 서치라이트에 갇히면 그 좁은 영역 이외엔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걸 잊지 말자.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