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雨馬)와 풍마(風馬)의 한판 대전 '황산대첩' 이야기
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98)
며칠 전 어느 기업 회장의 손에 들린 변방의 무사 '이성계 책'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어느 방송매체는 그 책 속의 황산대첩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변방의 무사 이성계에게 용의 기운을 들여준 지리산 황산대첩 이야기를 가진 곳은 지리산 운봉이다.
어제 명절 날 고향 선산 성묘에 갔다가 "자신의 조상이 황산대첩 전투에 참가 했다가 승전 후 개성으로 회군하지 않고 남아 살던 곳이 남원 감동마을이었다"며 "어릴 때 들었던 황산대첩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서 궁금한 것을 알고 싶다"고 한 어르신을 만났다.
감동마을 회관 준공 표지석의 마을 유래에는 '고려 말 우왕 시절 1380년 왜구의 침입 당시 '조장자'라는 분이 장수로부터 풍악산을 넘어 남쪽으로 은거지를 찾아오던 중 양지 바른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장수는 이성계 장군의 고려군이 황산대첩 승전 후 개경으로 돌아가던 회군로가 있던 곳이다. 그러니 그 시절 병사의 한 사람이 회군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넘어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감동마을 공동체의 신앙적 결집체는 '조왕중발'이라고 마을 유래집에 기록되어 있다. 가족의 안녕과 재앙을 예방하고 무병장수 기원을 가진 여성 중심의 신앙체인 조왕중발 문화는 부엌 부뚜막 정면 벽의 복판에 흙으로 조그맣게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중발 그릇을 올려놓고 정화수를 떠 놓는 신앙 행위다. 집집마다 똑같은 위치와 모양을 가지게 했던 감동마을의 조왕중발 신앙은 마을 공동체의 접착제였고 그 씨앗은 추운 지방의 난방방식인 온돌과 부엌의 구조에서 시작된 이성계 장군의 활동지였던 함흥지방의 것이었고 그 지역 출신의 병사가 이곳에 정착하여 싹을 틔운 것으로 보인다.
황산대첩은 왜구의 우룡과 고려 풍룡의 대전이었다. 왜구가 가졌던 1500여필의 말은 비와 구름을 뚫고 진격하는 전투력을 가졌고 150여필의 고려군 말은 바람을 일으키는 광야의 전투력을 가졌다. 왜구가 지리산 깊숙한 운봉현 인월에 진을 친 것은 비구름의 방어막이 존재한 지리적 요새였으니 고려군은 그 비구름을 몰아내는 바람몰이 전략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니 왜구의 우룡과 고려의 풍룡 대결에서 달을 가린 비구름을 몰아낸 풍룡의 신통력으로 고려는 나라의 운명을 구제 받은 것이다.
"고려군이 가졌던 그 신화적 결집체는 부엌의 조왕중발에서 나왔고 전쟁에 보내는 자식과 남편과 나라의 무사를 기원하는 여성들의 기원력이 하늘에 닿아 바람의 용을 움직이게 했다고 하니 전쟁 후 회군을 포기하고 이곳에 살기로 마음먹고 실천한 조상의 덕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이어진 옥야백리 공동체 고을을 고향으로 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느냐"며 그 어르신은 고향이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내가 오래 전에 구전을 모아 엮었던 '이성계 장군의 꿈의 길, 황산대첩에서 오목대까지'의 책 속에 그 이야기를 추가로 넣어야 할 것이니 설 명절 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으랴.
조상에게 상속 받은 백성의 기억이 고향의 실체다. 고향은 표를 받아내는 출세 도구가 아니라 침 뱉지 못하게 지켜야 할 공동체 샘물이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