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원성 감옥에 억울한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96)
조선시대 남원성 안에는 감옥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 감옥은 웓통형이었다. 우주에 있는 조상의 가르침으로 감옥에서 '개과천선'하라는 선조들의 우주관이 감옥의 모양을 원통형이 되게 한 것이다. 조선팔도의 360여개 고을의 감옥살이 죄인들 중 억울한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 남원이었다.
그 이유는 원님의 감옥관리 시스템에 있었다. 남원 원님은 매일 한 차례씩 성안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안위를 살폈다. 그 순시 코스에 빠지지 않은 곳이 감옥이었고 오후 4시쯤, 즉 '신시'에 감옥을 지나가는 일이었다. 이 때 감옥에 든 죄인이 억울함이 있어 방성통곡을 하면 원님이 그 죄인을 면담하여 억을한 사정을 청취하고 조치하였다.
남원 백성들은 그 감옥에서 나오는 소리를 '원감통곡'이라고 불렀다. 원통 감옥에서 나오는 통곡이라는 뜻이었다. 원통 감옥에서 질러대는 통곡소리는 울림과 소리가 메아리 파장을 내며 멀리 퍼져나갔으니 백성들도 다 들을수 있었다. 그러니 원님은 그 억울하다는 죄인의 전후 사정을 듣고 조치를 해야만 했다.
그 조치 결과로 억울한 사람이 방면 되면 성안 백성들은 원통 주먹떡을 만들어 들고가서 감옥 앞에서 출소자를 환영해 주었다. 남원성 감옥에는 춘향이도 있었다. 그 춘향의 마음은 조선팔도 백성의 마음속에 들어 살게 되었으니 남원성 감옥은 억울한 사람을 없게해 주는 길지 중의 길지인 셈이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에 찬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손가락 피를 내어 사정으로 임을 찾아볼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듯이 솟아서 비치고저
전전반측 잠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내가 만일 님못본채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앞에 섰난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요
무덤근처 선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있으란 말이냐...
-'쑥대머리' 가사 중에서 : 춘향이가 옥중에서 이도령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 일명 '옥중가(獄中歌)'
남원성 감옥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다. 향토 먹거리 시대의 자원은 문화에 있으니 남원 색깔을 가진 원통 주먹떡과 빵 같은 상품의 활용이 사람을 부르는 천년고도의 관광상품이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